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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태온에서 욱설러로 살아남기 (2)

설유빈 2025. 2. 28. 17:34

* 이전편: https://planetloop.tistory.com/31 

 

백태온에서 욱설러로 살아남기(1)

음... 뭐라고 소개해야 할 지 모르겠네요. 개그물이고요, 백태온에서 오타쿠질을 하는 정신나간 말단 조직원 유빈이의 하루입니다. 컨셉소개: 일주일 전 전략팀으로 발령난 신입 조직원, 태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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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우현의 표정이 순간 굳어진다. 그의 눈빛이 당신의 얼굴을 훑더니 손에 들린 책으로 향한다. 한 순간, 당신은 그의 눈에서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본다.

 

 "...욱설?"

 

 그가 그 단어를 천천히 되풀이한다. 마치 낯선 언어를 발음하는 것처럼 어색하게. 정우현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고, 그의 턱 근육이 경직된다.

 

 "그게 뭐지?"

 

 당신의 말이 끝나자마자 정우현이 재빠르게 당신의 가방을 향해 손을 뻗는다. 그의 움직임은 암살팀장답게 빠르고 정확하다. 당신이 반응할 틈도 없이 그가 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내들고 표지를 본다.

 

 정우현의 눈이 커지고, 그의 얼굴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스친다. 책 표지에는 강욱과 하설영의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고, 제목이 적혀 있다. '전략팀장의 50가지 그림자'.

 

 "이게 대체 뭐지?"

 

 정우현의 목소리가 낮아진다. 그가 책을 넘기기 시작하자 당신의 심장이 멎을 것만 같다. 정우현의 눈이 페이지를 빠르게 훑고, 그의 표정이 점점 더 경직된다.

 

-

 

 나는 아무것도 못 하고 이를 딱딱 부딪히며 정우현의 눈치를 살핀다. 머릿속이 온갖 생각으로 어지럽다. 조직의 명예를 실추시켰다고 쏴 버리면 어떡하지? 아니 근데 씨발 욱설은 진짜인데. 아까 둘이 같이 나가는걸 내가 봤는데. 이대로 죽으면 너무 억울하지 않나? 하... 그냥 차라리 이참에 정 팀장님도 욱설에 눈을 뜨면 좋겠다. 나 나름 댓글로 필력 쩐다는 칭찬도 많이 받았는데...

 

-

 

 정우현의 얼굴이 점점 굳어간다. 그의 긴 손가락이 책장을 넘기는 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에 흐른다. 강욱과 하설영의 관계를 적나라하게 묘사한 페이지를 읽을 때마다 그의 턱 근육이 경직되고, 날카로운 눈매가 더욱 가늘어진다.


 "이런 걸... 태온 내에서 유통하고 있었어?"

 

 그의 목소리는 낮고 위험하게 울린다. 책을 덮는 소리가 마치 운명의 문이 닫히는 것처럼 무겁게 들린다. 정우현이 주변을 둘러보고는 당신의 팔을 갑자기 붙잡는다. 그의 손아귀에는 강하게 힘이 들어가 있지만 이상하게도 당신에게 고통을 주지는 않는다.

 

 "따라와. 여기서 이야기할 문제가 아니야."

 

 그가 당신을 이끌어 태온 건물 옆 좁은 골목으로 데려간다. 그곳은 사각지대로, 감시 카메라도 없다. 정우현이 당신을 벽에 기대게 하고 자신은 그 앞에 서서 탈출로를 차단한다. 그의 키 큰 몸이 당신을 완전히 가린다.

 

 "실장님과 강욱 팀장이 이걸 알면... 어떻게 될 것 같아?"

 

 그가 책을 당신의 가방에 도로 넣으며 말한다. 그의 목소리에는 위협보다는 진지한 물음이 담겨 있다.

 

-

 

 "...죽겠죠...?"

 

-

 

 정우현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한다. 당신의 말이 그에게 뭔가를 깨닫게 한 듯하다.

 

 "그래, 죽을 수도 있어."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그의 얼굴에는 위협이 아닌 조금 다른 감정이 스친다. 뭐랄까... 약간 흥미에 가까워 보이는 감정.

 

 "이거... 다른 사람들에게도 많이 팔았어?"

 

 정우현이 주변을 다시 살피며 당신에게 더 가까이 다가선다. 그의 체온이 느껴질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진다.

 

 "...이 소설이 진실을 담고 있는 건가?"

 

 그의 눈빛이 당신의 녹색 눈동자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정우현의 질문에는 단순한 호기심 이상의 무언가가 담겨 있다. 마치 그도 강욱과 하설영 사이에 뭔가가 있다고 의심하고 있었던 것처럼.

 

 "내게 솔직히 말해. 이건 네 상상력이야, 아니면..."

 

 그의 말이 공중에 멈춘다. 태온의 암살팀장이 이런 가십에 관심을 갖는다는 사실이 당신을 더욱 긴장시킨다. 정우현이 신뢰를 주려는 듯 손을 뻗어 당신의 어깨를 가볍게 잡는다.

 

 "네가 본 것이 있다면, 나에게 말해도 돼."

 

-

 

 헐.

 

 나의 눈이 크게 떠진다.

 

 지금... 정우현이, 그 정우현이... 욱설에... 관심을 보인 건가?

 

 아!!!!!!! 내 주식 개떡상한다!!!!!!!

 

 나는 흥분해 거칠어진 숨을 진정시키려 애쓴다. 아... 무슨 떡밥부터 말해줘야 하지. 한두개가 아닌데... 후... 일주일 전에 단둘이 실장실에서 두시간 넘게 안 나오고 있었던 거? 거기서 나온 강욱 손목에 붉은 자국 남아 있었던 거? 어제 대회의 시간에 강 팀장님이 하 실장님만 빤히 쳐다보고 있었던 거? 시발, 머리에 떠오르는 게 너무 많아서 과부하가 올 지경이다.


 "아... 이게 진짜 할 말이 많은데..."

 

 둘이 아...진짜 사귀는데... 고민하던 나는 한참 뜸을 들이다 그가 답답해할 지경이 되어서야 겨우 입을 연다. 그 둘의 인연은 강욱이 처음 태온에 입단한 그 해부터 시작되었는데...

 

 나는 그렇게 30분동안 단 한번도 입을 멈추지 않고 정우현에게 '욱설 연대기'를 읊어 준다. 너무 집중해서 떠든 나머지 말하는 내내 그의 표정도 제대로 보지 않은 것 같다. 뭐 어쩌겠는가, 흥분한 오타쿠란 원래 그런 법이다.

-

 정우현의 표정이 점점 변해간다. 처음에는 의심스러운 눈빛이었지만, 당신이 '욱설 연대기' 를 진지하게 풀어놓을수록 그의 눈빛은 점점 더 깊어진다. 가끔 그의 턱 근육이 경직되거나 눈썹이 살짝 올라가는 모습에서 그가 이 정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신의 열정적인 설명이 끝나자 정우현은 한동안 침묵한다. 그의 날카로운 눈매가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는 듯하다.

 

 "...그래서 네 말은, 이 모든 것이 단순한 소설이 아니라는 거군."

 

 그가 천천히 말한다. 그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담겨있다.

 

 "소설 몇 권만 가져와. 내가 확인해 봐야겠어."

 

 정우현이 당신에게 손을 내민다. 그의 시선은 이제 경계심보다는 진지함으로 가득하다.

 

 "이건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하자. 네가 안전하게 이 일을 계속하려면... 내 보호가 필요할 테니까."

-

 

 나는 굳은 결의가 깃든 표정으로 내밀어진 손을 맞잡는다.  우선 그에게 남은 회지 중 한 권을 건네고, 다음에 다른 것도 건네주기로 약속한 나는 떨리는 심장을 붙들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온다. 아직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 기분이었다.

 

 이토록 성공적인 영업이 또 있었던가? 욱설 팬픽쓰기 개잘했다 진짜...

 

 나는 키보드를 두드리면서도 계속해서 시계만 쳐다본다. 퇴근시간 언제 되는 거지. 아. 빨리 숙소 돌아가서 쓰던거 마저 써야 하는데. 오늘 뜬 떡밥도 싹 다 풀어야 하는데. 미치겠다. 일이 하나도 손에 안 잡혀... 그렇다고 여기서 켰다가 걸리면 죽음이고, 윽... 차라리 딴 생각 안 들게 누가 잡일이라도 좀 시켰으면 좋겠네.

 

-

 

 사무실의 시간은 느리게 흘러간다. 당신이 업무에 집중하려 애쓰는 동안, 주변의 조직원들은 각자의 일에 몰두해 있다. 그러나 가끔 누군가의 시선이 당신을 향하는 것 같은 느낌에 불안함이 커진다.

 

 오후 3시경, 전산팀에서 한 사람이 다가온다.

 

 "설유빈씨, 전산팀장님이 자료 검토 좀 부탁하셨어요."

 

 당신이 따라가자 미로같은 복도를 지나 전산팀 구역에 도착한다. 그곳에는 노란 머리의 민선재가 모니터 앞에 앉아있다. 그가 당신을 보자 예민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올린다.

 

 "왔어? 앉아."

 

 그의 목소리는 건조하고 신경질적이다. 민선재는 당신 앞의 책상에 대뜸 종이뭉치를 턱 내려놓는다. 수기로 쓴 데이터 뭉치. 누가 썼는지는 몰라도 상당히 악필이다.

 

 "이거 다 엑셀로 옮겨 놔. 오류 찾아내면 보고해."

 

 민선재의 눈빛에는 평소와 다른 무언가가 있다. 그가 당신을 잠시 관찰하듯 바라보다가 은근하게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요즘... 재미있는 일 없어?"

 

 그의 질문에 담긴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 단순한 일상 대화인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지. 민선재의 날카로운 눈빛이 당신의 반응을 기다린다.

 

-

 

 "재미... 있는 일이요? 딱히..."

 

 딱히는 개뿔, 있었다.

 암살팀장님 욱설러로 전직시킨 거.

 지금도 너무 짜릿해서 미칠 것 같다.

 근데... 그 얘기를 민선재한테 어떻게 해?

 

 나는 잘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 의자를 끌어다 모니터 앞에 앉는다. 전산팀원들은 다 뭐 하고 나한테 이런 거나 시킨담. 그래도 귀찮기만 할 뿐 어려운 일은 아니었기에 나는 엑셀을 켜고 데이터를 하나하나 입력하기 시작한다. 6? 0? 아이씨, 도대체 어떤 새끼가 쓴 거야. 하나도 못 알아보겠네.

-

 

 민선재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당신의 얼굴을 꿰뚫듯 응시한다. 당신의 태연하고 담담한 대답에 그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간다.


 "그래? 별일 없다고?"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닫는다. 사무실 안이 갑자기 조용해진다. 민선재가 다시 당신 옆에 앉으며 목소리를 낮춘다. 그의 눈빛에 의심이 가득하다.

 

 "이상하네. 요즘 태온 내부에서 뭔가 재밌는 게 돌고 있다던데."

 

 그가 키보드를 몇 번 더 두드리자 화면이 전환된다. 당신의 심장이 한 박자 멈춘다. 화면에는 건물 뒤편 공터의 CCTV 영상이 재생되고 있다. 영상 속에는 후드를 쓴 당신과 정우현이 대화하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인다.

 

 "우리 전산팀은 모든 걸 본다고."

 

 민선재가 의자를 돌려 당신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그의 샛노란 머리카락이 형광등 아래서 더욱 강렬하게 빛난다.

 

 "그래서... '욱설'이 뭐야? 정우현이 관심 갖는 그거?"


 그의 목소리는 예민하면서도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다. 민선재가 주변을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춘다. 

 

 "나도... 좀 볼래."

 

-

 

 CCTV에... 소리도 녹음되던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순간 소름이 쫙 돋아 키보드 위의 손이 뚝 멈춘다.

 

 하지만... 이미 정우현을 함락시키고 온 나다. 민선재 정도야.

 

 피식 미소를 지은 나는 키보드에서 손을 뗀다. 가방에서 조심스럽게 꺼낸 것은 마지막으로 딱 한 권 남은 회지. 점심시간 끝나기 직전에 거래하기로 했던 '파천혈마' 님이 급한 사정으로 못 온다고 해서 남은 것이다. 달아 주시는 댓글마다 부산 사투리가 진하게 묻어나서 가끔 해석에 시간이 걸릴 때도 있지만... 이 분도 제법 꾸준히 읽어 주시는 분이라 정들었는데. 그런 그의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걸까? 책을 건네는 손에 묘하게 아쉬움이 묻어난다.

 

 아... 원래 이거 다 팔았어야 하는 건데, 민 팀장님이니까 특별히 그냥 드리는 거예요.

 

 그래도 지금 중요한 건 눈앞의 민선재지. 속내를 숨긴 채 약간 능청을 떨며 회지를 건넨 나는 그가 책을 훑어보는 동안 신경쓰지 않는 척 다시 데이터를 옮겨 적는다. 물론 그런 척만 했을 뿐, 지금 내 신경은 온통 그의 시선과 반응에만 쏠려 있다. 6인지 0인지 알게 뭐야. 애초에 못 알아보게 쓴 사람 잘못이다.

 그나저나... 우리 전산팀장님은 저걸 읽고 무슨 반응을 보이려나.

 

-

 

 민선재의 손이 회지를 받아들고, 그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표지를 훑는다. 처음에는 호기심 어린 표정이었지만, 페이지를 넘길수록 그의 얼굴이 점점 변해간다. 그의 얇은 입술이 미묘하게 벌어지고, 눈이 조금씩 커진다.


 "이거... 진짜 하설영 실장님이랑 강욱 팀장 얘기야?"

 

 그의 목소리에는 놀라움과 흥분이 뒤섞여 있다. 민선재가 주변을 다시 살피고는 책을 더 가까이 당겨 읽는다. 그의 표정이 점점 집중되어간다.

 

 "씨발... 이거 누가 썼어? 너야?"

 

 당신이 대답하기도 전에 민선재가 페이지를 빠르게 넘긴다. 맨날 코드만 줄창 보는 전산팀장이라 읽는 속도도 남다른지 그의 눈이 페이지 위를 춤추듯 움직인다.

 

 "이... 이런 상상력이 가능하다고? 근데 이거 진짜 같아. 둘이 저번주에 회의실에서 분명..."

 

 그가 갑자기 말을 멈추고 당신을 의심스럽게 바라본다.

 

 "너 어떻게 알았어? 실장님이랑 강욱 팀장이 실제로..."

 

-

 

 나는 승리자의 미소를 짓는다. 이럴 줄 알았어. 역시... 민 팀장님도 예전부터 의심하고 있었구나. 욱설 진짜라니까.

 

 "글쎄요... 작가는... 저도 잘."

 

 근데... 태온 익게에 연재글이 올라오더라고요. 이건 그동안 올렸던 것들 하나로 묶어서 낸 거래요.

 

 그게... 이틀에 한 편씩 올라오던가?

 

 나는 은근히 목소리를 낮춰 비밀을 말하듯 민선재에게 바짝 붙어 속삭인다. 전에 듣기로 원래 민 팀장님은 여자랑 가까이 있으면 눈에 띄게 당황스러워한다던데, 지금 회지에 정신이 다 팔려 버린 그는 나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다행이지. 자, 와라, 욱설의 세계로...!

 

-

 

 민선재의 눈이 점점 커진다. 당신이 '익게' 를 언급하자 그의 반응이 더욱 격렬해진다. 그가 의자를 당신 쪽으로 끌어당기며 목소리를 낮춘다.


 "익게, 태온 익명게시판...? 그래, 그 곳에 올라오는 건가."

 

 그의 손가락이 책의 페이지를 더욱 빠르게 넘긴다. 민선재의 호흡이 조금 거칠어지고, 노란 머리카락 사이로 이마에 땀이 맺히기 시작한다.


 "난 그냥... 둘이 뭔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일 줄은..."

 

 그가 특정 페이지에서 멈춰 집중해서 읽는다. 그의 얼굴이 미묘하게 붉어진다.


 "이거... 실장실에서 있었던 일 말하는 거지? 지난달에?"

 

 민선재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살짝 떨린다. 그가 주변을 다시 확인하고는 책을 조심스럽게 접는다.

 

 "이거 더 없어? 다음 편은? 나 이거... 계속 볼래."

 

 그의 눈빛에는 이제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선 열정이 담겨 있다.

 

 새로운 욱설러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

 

 다음 편은... 오늘 저녁에 올라가요. 나는 그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모니터에는 그래프까지 포함해 깔끔하게 정리된 엑셀 차트가 띄워져 있다.

 

 시간은 벌써 오후 5시. 오늘은 빨리 들어가야 하니까 슬슬 저녁을 먹어 볼까.

 

 후후... 들어가자마자 빨리 글부터 써야지. 벌써 독자가 두 명이나 늘었는데. 

 

-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며 태온 본부의 분위기가 조금씩 느슨해진다. 당신이 전산실을 나와 복도를 걸어갈 때, 몇몇 조직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저녁 식사를 고민하며 걷는 당신의 발걸음 소리가 복도에 울린다.


 식당으로 향하는 길에 갑자기 누군가가 당신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다. 뒤돌아보니 하설영 실장이 서 있다. 그의 차가운 연갈색 눈동자가 당신을 담담하게 바라본다.

 

 "설유빈 씨, 잠시 시간 있습니까?"

 

 하설영의 목소리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차분하기 그지없다. 그가 당신에게로 손짓하며 조용히 말을 이어간다.

 

 "식사 전에 잠깐 실장실로 좀 따라오십시오. 간단히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의 표정에서는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다. 하설영이 말을 마치자마자 뒤돌아 걸어간다. 이상하게 그의 뒷모습에서는 평소와 다른 긴장감이 느껴진다.

 

-

 

 뭐지.

 

 실장님이 겨우 말단 조직원인 나를...?

 

 나는 순간 놀라서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하고 굳었다가, 먼저 몸을 돌려 앞장서는 그를 뒤늦게 따라간다.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거지?

 

 앞서 가는 그의 걸음은 언제나처럼 들릴 듯 말 듯 조용하다. 별로 크지 않은 내 발걸음 소리가 유난히 신경쓰일 만큼.

 

 실장님과 함께 걷다 보니 이쪽으로 이목이 집중된다. 아, 씨, 민망하네... 설마 오늘 회지 팔던거 실장님도 보셨나? 실장님은 절대 안 찾는 곳이라서 그럴 리가 없는데, 남자친구나 부르지 왜 나를 부르시는 거야. 빨리 밥 먹고 가야 하는데...

 

 솔직히 까마득한 상사가 대뜸 나를 호출하면 잘못한 게 없어도 괜히 긴장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정말로 잘못한 게 있는 나는, 지금 얼마나 쫄리겠냐고. 초조함이 가득한 잰걸음이 하설영의 뒤를 쫓는다.

 

-

 

 조용한 복도를 따라 하설영의 실장실로 향하는 동안, 주변 조직원들의 시선이 당신에게 쏠린다. 하설영은 한 마디도 없이 앞장서 걸으며, 가끔씩 고개를 살짝 돌려 당신이 따라오는지 확인한다.


 실장실 문 앞에 도착하자 하설영이 카드키를 꺼내 문을 열고 당신을 안으로 들이고 문을 닫는다. 그의 사무실은 미니멀하고 정돈되어 있다. 흰 벽에는 어떤 장식도 없고, 책상 위에는 서류들이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다.

 

 "앉으십시오."

 

 하설영이 실장실 가운데 놓인 소파를 가리키며 말한다. 그가 창문을 닫고 블라인드를 내린다. 실내가 갑자기 어두워진다.

 

 "최근 조직 내에서 특이한 소문이 돌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설영이 책상 쪽으로 걸어가며 차분하게 말한다. 순간 몸을 돌려 당신을 쳐다보는 그의 연갈색 눈동자가 당신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고 관찰한다.

 

 "그 소문에... 제 이름이 언급된다고 하더군요. 혹시 알고 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