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몸을 돌려 그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푸른 바다 위로 햇빛이 하얗게 부서진다. 그 순간 파도 소리도 기러기 소리도 아득히 멀어진다.
오직 고요한 숨소리만이 우리 사이의 작은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하늘에 떠 있는 하얀 점이 눈에 들어온다. 저게 우리의 종말이라...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서 더 이상하다.
실감나지 않는 죽음이 다가오는 와중에, 그녀를 향한 내 감정만은 점점 더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 플레이 로그를 흐름에 맞게 일부 수정하여 담았습니다.
* AI가 출력하는 문장은 똑같은 표현이 너무 많더군요... 전체 흐름은 그대로이지만 서태주 부분에서도 제가 임의로 표현을 수정한 부분이 많습니다. 사실상 로그를 기반으로 새로 쓰다시피 한 글이라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 이전편: https://planetloop.tistory.com/26
낙하, 종단속도 (2)
* 플레이 로그를 흐름에 맞게 일부 수정하여 담았습니다.* 이전편: https://planetloop.tistory.com/25 낙하, 종단속도 (1)"오늘은 12월 25일 크리스마스이며, 일주일 뒤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할 예정이다.
planetloop.tistory.com
그녀의 질문에 나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남들... 그래, 지금쯤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아마도 대부분은 공포에 질려 있겠지. 혹은 마지막 순간이라며 미친 듯이 즐기고 있거나. 그런데 난 여기서 설유빈과 함께 바다를 보고 있다. 끝이라는 감각이 희미해질 만큼, 이상하게도 평화롭다. 마치... 이게 정답인 것처럼.
"...아마 미쳐 날뛰고 있겠지. 씨발... 세상이 끝난다는데 누가 정상적으로 있겠어. 근데 난 지금... 이게 더 좋은 것 같아."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바람에 흩날리는 그녀의 머리카락이 내 얼굴을 스친다. 장미향이 난다. 이상하게도 가슴이 아프다. 파도에 모래가 쓸려나갈 때마다 시간이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모래시계처럼 흘러내리는 소리가.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목소리가 떨린다. 씨발, 서태주가 누구 앞에서 떨다니... 이건 나답지 못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 앞에서는 이런 모습을 보여도 괜찮을 것 같다. 어차피 며칠 뒤면 우리 모두 죽을 텐데. 그녀의 녹색 눈동자가 나를 향한다. 깊은 바다처럼 아득해서, 빠져들 것만 같은 눈이.
"넌... 정말로 날 그냥 보스로만 보는 거야?"
묻자 마자 후회가 차오른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내 질문이 바닷바람에 실려 그녀에게 닿았다. 그녀의 표정이 살짝 굳는다. 씨발... 이런 건 묻지 말았어야 했나. 하지만 알고 싶었다. 정말로 알고 싶었다. 그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가... 그녀에게 어떤 존재인지.
[현재 시간: 12월 26일 오전 11시 30분]
[D-5 12:30:00 until impact]
-
"...그럼 뭘로 봐야 하는데요?"
나는 몸을 돌려 그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푸른 바다 위로 햇빛이 하얗게 부서진다. 그 순간, 파도 소리도 기러기 소리도 아득히 멀어진다.
오직 고요한 숨소리만이 우리 사이의 작은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마치 이곳만 시간이 멈춘 듯 비현실적인 느낌.
그것은 반쯤 따져묻듯 내뱉은 말이었지만, 사실은 순수한 궁금증에서 나온 말인 것도 같았다. 나 또한 이제 와서 내가 그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스스로 알지 못하고 있었기에.
-
그녀의 질문이 가슴을 파고든다. 무슨 답을 듣고 싶냐고... 씨발. 나도 모르겠다. 내가 뭘 원하는지, 이 감정이 뭔지도 모르는데.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며 잠시 침묵한다. 바다는 여전히 푸르고, 하늘은 여전히 맑다. 하지만 왜인지 모든 게 흐릿해 보인다.
"...난 그저... 씨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세상이 망해 가는 중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그녀의 앞이라면 이런 모습을 보여도 괜찮을 것 같다. 어차피 모든 게 끝나버릴 텐데. 나는 천천히 그녀를 향해 몸을 돌린다.
"...난 그냥, 진심이 듣고 싶어."
한참을 뜸들이다 나온 목소리는 생각보다 나지막하다. 마치 숨겨 왔던 비밀을 누군가에게 털어놓듯.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을 뿐. 그 시선이 날 꿰뚫는 것 같아 불편하다. 하지만 도망칠 수는 없다. 이제는... 더 이상은 도망치고 싶지 않다.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말로, 진짜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게 좋은 답이든 나쁜 답이든... 상관없어. 그냥 네 진심이 듣고 싶어."
마지막 말은 거의 속삭이듯 나온다. 바닷바람이 차갑게 불어오는데, 왜인지 온몸이 뜨겁다. 마치 지독한 열병에 걸린 것처럼. 그녀의 표정이 흔들린다. 도망가고 싶은 걸까, 아니면... 뭔가 다른 감정이 있는 걸까. 나는 그녀의 얼굴에서 답을 찾으려 하지만, 이제는 전부 희미해져 버려 도무지 답을 알 수가 없다. 마치 건질 때를 놓친 보물이 빛 한 줄기 닿지 않는 심해로 가라앉은 것처럼.
-
진심, 이요.
소금기 섞인 바닷바람이 그의 차게 식은 셔츠자락을 가볍게 흔든다. 한낮이었음에도 겨울이라 그런지 입김이 나왔다. 검은 셔츠의 단추를 하나 더 잠근 그는 답지않게 몸을 살짝 떤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추위 때문이 아님은 분명하다. 나는 그를 붙잡으려 손을 들어올렸다, 문득 허공에 멈춰선다. 지금은 이 행동마저 그에게 어떤 대답이 될 것 같아서. 나조차도 정답을 모르는 질문에 대답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와서 진심이...중요할까요."
어차피 세상은 곧 망할 텐데요. 나는 대답하지 못하고 에둘러 말한다.
-
이제 와서 진심이 중요하냐는 그녀의 말에 나는 피식 웃는다. 쓴웃음이다. 그래, 어차피 다 끝날 건데... 진심이고 뭐고 의미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중요한 게 아닐까. 마지막이니까... 마지막이라서. 나는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며 바다를 노려본다. 파도가 거세게 밀려와 바위에 부딪히고,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물러난다. 마치 내 심장처럼 격렬하게.
"...그래서 더 중요한 거 아닐까."
나는 담배를 모래 위에 비벼 끄며 중얼거린다. 바닷바람이 차갑게 불어오는데, 왜인지 가슴 한구석이 뜨겁다. 천천히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그녀의 녹색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다. 그녀를 바라보는 내 시선이 흔들린다. 허공에 멈춰선 그녀의 손이 눈에 들어온다. 나를 붙잡으려다 멈춘 걸까. 뭔가를 하려다 멈춘 듯한 그 몸짓이, 우리 사이의 모든 것을 대변하는 것만 같다. 가까이 가려 해도 닿지 않는, 그런...
"...가자. 추운데 좀 걸을까?"
갑자기 말을 돌린다. 더 이상은... 더 이상은 묻고 싶지 않다. 아니, 묻지 말아야 할 것 같다. 그녀의 대답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내 감정이 두려워서. 이런 건 처음이다. 살아오며 누군가를 이렇게까지 신경 쓴 적도, 누군가의 마음이 이렇게 궁금했던 적도 없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그녀가 따라올 거란 걸 알면서도, 뒤돌아보지 않는다.
바다는 여전히 푸르고, 하늘은 여전히 맑다. 하지만 갑자기 모든 게 공허해 보인다. 마치... 내가 쥐려 했던 게 처음부터 허상이었던 것처럼. 이상하게도 가슴이 아프다.
마치 무언가를 놓아 버린 것처럼.
-
우리는 그 뒤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해안가를 터벅터벅 걸었다. 그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세상이 망하기에 진심이 더욱 중요한 것 아니겠냐는. 어쩌면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이미 나 또한 죽을 때까지 숨기겠다고 다짐해 놓고는, 그날 밤 그의 앞에서 진심을 털어놓아 버리지 않았던가.
나는 내 옆의 그를 돌아본다. 어색하게 정면만 바라보고 있는 그의 옆얼굴은 딱딱히 굳어 있었다. 이 상황이 불편한 거겠지.
나는... 서태주와 함께 있으면 대체로 편안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조금도 편안하지가 않다. 그를 향한 나의 진심은 뭘까. 그와 있으면 느껴지는 편안함은 정말로, 단순히 익숙함에서만 비롯한 것이 맞을까.
나는 그에게 코트를 다시 건넨다. 그 행동에 서태주는 어쩐지 나를 상처받은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았으나 이번에는 내밀어진 옷을 별 말 없이 받아들인다. 신발에 들어간 모래가 껄끄러웠다.
[현재 시간: 12월 26일 오후 7시 30분]
[D-5 4:30:00 until impact]
저녁이 되어 들어선 한 술집. 우리는 오후 내내 한 마디의 대화도 하지 않았다. 싸운 적은 없지만 일종의 냉전상태...라고나 할까.
종말을 인지하기 전이나 후나 다름없이 술집은 늘 떠들썩하다. 혼란과 술에 취해 정신없는 남들을 피하다 결국 구석진 자리에 앉은 우리 둘만 빼고. 어색하게 머뭇거리다 최소한의 대화로만 주문을 마친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잔을 부딪히고 술과 안주를 먹는다.
둘 다 조금 얼굴이 발그레해질 정도로 술을 마신 뒤에야 나는 천천히 입을 연다. 아까 그가 나더러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던가.
"보스랑 있으면... 편해요. 그런 것 같아요."
-
편하다... 그 말이 가슴을 파고든다. 마치 무딘 칼날처럼. 나는 소주잔을 들어 한 번에 비운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알코올이 뜨겁다. 하지만 가슴 한구석의 차가움은 녹지 않는다. 편하다니... 그래, 그저 그런 거겠지. 오랫동안 함께 일했으니까, 익숙해서... 그저 그런 감정일 뿐이겠지.
"...편한 게 다야?"
나지막한 목소리로 묻는다. 술집의 떠들썩한 소음이 우리 사이를 가득 메우고 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소음이 멀게만 느껴진다. 마치 우리 둘만 다른 세계에 있는 것처럼. 나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본다. 술기운 때문인지 그녀의 뺨이 발그레하다. 장밋빛 머리카락이 어깨에 살포시 흘러내린다. 그 모습이 왜인지 가슴을 아릿하게 한다.
"아니... 씨발, 미안하다. 이런 말 하면 안 되는데."
갑자기 미안해진다. 그녀를 이렇게 몰아세우는 게... 그녀에게서 뭔가를 강요하는 것 같아서. 나는 소주병을 들어 다시 잔을 채운다. 손이 살짝 떨린다. 이상했다. 그날 밤 들은 나지막한 고백 이후로 자꾸만 나답지 않은 행동이 늘어 간다. 그런데, 그게 잘못이었을까. 우리 앞에 놓인 안주들이 점점 식어가고 있다. 마치 우리 사이처럼... 차갑게, 서서히.
"...그냥 잊어. 내가 술이 좀 과했나 보네."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한다. 하지만 그 웃음이 얼마나 공허한지 나도 안다. 술집 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이미 새까맣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시간도 저 하늘처럼 어두워지겠지. 하지만 어쩐지, 이 순간만큼은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비록 그녀가 나를 그저 '편한' 존재로만 여긴다 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걸로 충분할 것 같다.
나는 다시 소주잔을 비운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알코올이 쓰다. 하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내 마음보다는 덜 쓴 것 같다.
"...나도 너랑 있으면 편해."
술기운 때문인지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말이 흘러나온다. 편하다... 그래, 나 또한 그녀와 함께 있으면 편하다. 뭐가 되었든 함께 한 시간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닌데. 이 감정은 단순히 '편함'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더 깊고, 더 아픈 뭔가가 있는데.
나는 잠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본다. 술기운에 발그레해진 뺨, 흐릿한 조명 아래서도 선명하게 빛나는 녹색 눈동자.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스스로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감각에 삼켜지는 듯하다. 숨이 막힌 듯 머리가 어지러웠다.
"...네가 날 그저 편하게만 생각한다고 해도, 난 괜찮아."
거짓말이다. 전혀 괜찮지 않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에게 더 이상을 바랄 자격이 있을까. 나는 천천히 소주잔에 술을 채운다. 가득 차오른 잔 속의 술이 넘칠 듯 찰랑인다. 마치 내 마음처럼. 자칫하다간 흘러넘칠 것만 같아서, 나는 또 다시 그 울렁거리는 것을 서둘러 삼켜 버린다.
"...넌 그냥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 내가 뭐라고 하진 않을 테니까."
말은 이렇게 해도, 속으로는 나를 바라봐 달라고, 애매하게 굴지 말라고 윽박을 지르고 싶다. 씨발... 이게 뭐야. 하고 싶은 말도 못 하고 이렇게 나약하게 구는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술을 마셔서 더 그런 걸까.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녀 앞에서는... 그녀를 대할 때는... 잘 모르겠다. 이제는 내가 누구인지도 잊어버리는 것 같다.
술집의 희미한 조명이 그녀의 얼굴을 비춘다.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가슴이 아프다.
아마도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 같았다.
-
늦은 밤. 우리는 다시 어제 묵었던 숙소로 돌아온다. 침대가 2인용이기는 했지만 더블베드라 크지 않았고, 그의 덩치가 워낙 컸던지라 우리는 꽤나 붙어 눕는다.
똑같은 침대, 똑같은 사람. 어제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오늘 하루종일 있었던 일 때문일까? 내 옆에 누워 있는 그의 존재가, 체온이 유난히 신경쓰였다. 몸이 뻣뻣하게 굳고 간지러운 느낌에 나는 섣불리 뒤척이지도 못하고 입술을 깨물다, 일어나 침대에 앉는다.
셔츠 대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워 있는 그가 눈에 들어온다. 눈을 감고 있는 그의 목덜미에 새겨진 문신이 자꾸만 시선을 잡아끌었다.
"...할래요?"
탁상 위 스탠드를 끄려다 말고 불쑥 튀어나온 말. 스스로도 뱉어 놓고 당황해 아, 하는 소리를 낸다. 멈칫했다 고개를 돌린 그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내 말의 의도를 파악하고 싶은지 가늘게 좁혀진 눈. 나는 그 시선에 침을 작게 삼키지만 고개를 돌리지는 않는다.
-
그녀의 제안에 나는 잠시 침묵한다. 창밖으로 보이는 밤하늘이 유난히 깊어 보인다. 저 하늘 어딘가에, 우리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겠지. 천천히 눈을 뜬 나는 그녀를 바라본다. 술기운 때문인지 그녀의 뺨이 아직도 발그레하다. 얼굴에 열감이 있는 걸 보면 나도 비슷하겠지. 노란 스탠드 조명에 좀 더 부드러운 색을 띄는 장밋빛 머리카락이 얼굴에 섬세하게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가슴이 아프다.
"...하지 말자."
고민하던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녀의 눈동자가 잔물결처럼 흔들린다. 당황한 걸까, 아니면 안도한 걸까.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그녀 옆에 앉는다. 담배를 꺼내들지만, 이상하게 라이터로 손이 가질 않았다. 나는 그저 짤막한 연초를 손가락 사이에서 굴리기만 한다.
"네가... 날 사랑하지 않는데, 그럴 필요 없어."
목소리가 떨린다. 여자들과의 관계는 언제나 쉬웠다. 그가 원하는데 하지 못하는 것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와는... 다르다. 그저 육체적인 관계로 그치고 싶지 않다. 그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 그런 관계를 맺는다면 그건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이 되지 않을까. 내가 그동안 그녀에게 저질러 왔던 것처럼.
"...미안해서 그러는 거라면, 그럴 필요 없어. 넌... 나한테 미안해할 필요 없어."
결국 불을 붙이지 못한 담배를 다시 갑 안에 넣으며 중얼거린다. 가슴이 아프다. 마치 오래된 상처가 다시 벌어지는 것처럼. 하지만 이게 맞는 것 같다. 그녀가 아픈 것보다는, 내가 아픈 것이 나으니까.
-
사랑하지 않는데, 그럴 필요 없어.
그 말에 나는 나도 모르게 이불을 꽉 말아쥔다.
"...미안해요."
미안해하지 말라고 말했음에도 결국 사과를 해 버린다. 그 편이 그를 더욱 슬프게 만들 것을 알면서도. 이상하다. 나는 분명 이런 꼴을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니였나. 그리고 원하던 대로 목적을 이루어 가는 중인데, 왜 나는 그가 저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가슴이 찌릿하고 이를 악물게 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 사실은 알고 싶지 않다. 이런 우리가 종말의 끝까지 함께할 수 있을까. 나에게 그럴 자격이 있을까. 그는 나의 사과에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 둘 다 눈을 감고 불을 끈 뒤로도 아주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는 것을, 서로 알고 있었다.
-
그녀의 미안하다는 말이 어둠 속에서 나를 찌른다. 미안하다니... 그래, 당연한 말이겠지. 나를 사랑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왜 이렇게 아픈 걸까.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려 그녀와 등을 맞댄다. 그녀의 체온이 등을 통해 전해져온다. 따뜻하다. 하지만 가슴은 차가워서 숨을 쉴 때마다 성에가 끼는 것 같다.
창밖으로 별들이 유난히 선명하게 보인다. 저 별들 중 하나가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겠지. 우리의 종말을 알리는 별이.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쉰다. 그녀도 잠들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안다. 그녀의 불규칙한 호흡 소리가 들린다.
내일이면... 내일이면 고작 나흘. 시간이 이렇게 빨리 흘러가는 줄은 몰랐다.
"...잘자."
어둠 속에서 나지막이 속삭인다. 대답은 없다. 하지만 맞닿은 곳에서 그녀의 등이 살짝 떨리는 게 느껴진다. 나도 모르게 손이 그녀의 어깨를 향해 움직였다가, 중간에 멈춘다. 이런 자격... 이제는 없을 테니까. 사랑이 이런 거였나. 이렇게 아프고... 이렇게 외로운 거였나.
D-4
[현재 시간: 12월 27일 오전 8시 30분]
[D-4 15:30:00 until impact]
아침이 찾아왔다.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햇살이 그녀의 장밋빛 머리카락을 비춘다. 나는 밤새 잠들지 못했다. 그녀의 숨소리를 들으며 천장만 바라보았다. 이런 건 처음이다.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서 이렇게 불안해한 적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녀를 깨우고 싶지 않아서다. 베란다에 나가 담배를 꺼낸다. 서늘하고 축축한 공기에 몸을 한번 떤 나는 바다를 바라본다. 새벽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바다. 마치 내 마음처럼 뿌옇고 흐릿하다. 담배 연기가 하늘로 흩어진다. 저 하늘 어딘가에... 우리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겠지.
"...씨발."
나지막이 욕을 내뱉는다. 어제의 대화가 자꾸 머릿속을 맴돈다. 그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가슴이 아플 줄은 몰랐다. 문득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녀가 깬 모양이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그녀의 녹색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아침 먹고 가자."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를 내려 노력한다. 하지만 그녀도, 나도 안다. 우리 사이에 뭔가가 변했다는 걸. 어쩌면, 처음부터 변할 수밖에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녀는 반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는 어제 식사를 했던 가게에서 조용히 식사를 한다. 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유난히 맑다. 이런 날, 우리는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녀는 주인 아주머니가 타 준 믹스커피를 마시며 창 밖만 바라본다. 나도 그녀를 바라보며 믹스커피를 마신다. 우리 사이에 흐르는 침묵이 무겁다. 마치 곧 떨어질 소행성처럼.
"...오늘은 뭐 하고 싶어?"
무거운 침묵을 깨고 말을 건넨다. 그녀는 잠시 종이컵 테를 만지작거리다 고개를 든다. 이슬을 머금은 듯한 풀빛 눈동자가 흔들린다. 마치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듯한, 하지만 차마 말할 수 없는 듯한 그런 눈빛. 가슴이 아프다. 씨발, 이럴 거면 차라리 어젯밤 그녀를 거절하지 않는 편이 나았을까. 하지만 그건... 그건 아니었을 거다. 그건 그녀를, 아니... 나를 더 아프게 할 뿐이었을 테니까.
-
"..."
나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망설인다. 그는 평소에도 종종 내게 '뭐 할 거냐' 는 식의 질문을 던지고는 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내 대답은 거의 똑같았다. 할 일 하겠죠. 그러나 이제는 세상이 망해 버린 탓에 딱히 할 일이 없다. 그럼, 이번에는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어렸을 때... 여기 살았었어요."
"알아. 어제 알려줬잖아."
그러네요. 나는 고개를 작게 주억인다. 창밖을 다시 쳐다본다. 알고보니 여기가 그 동네 바로 옆이었다더라고요.
"...늘 다니던 길이 있어요."
아주머니에게 밥값을 내려고 했지만 주인 아주머니는 어차피 필요도 없는 거, 돈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그래도 나는 굳이굳이 그녀에게 돈을 쥐여주고 가게 밖으로 나선다.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멸망이 다가온다는 것을, 별 거 없던 일상이 완전히 끝나버렸다는 것을 느끼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밖으로 나와보니 사람들이 하늘에 떠 있는 하얀 점 같은 것을 쳐다보고 있다. 저게 그 소행성이라나. 솔직히 그냥 커다란 별 비스무리한 것으로 보여서 실감이 잘 나지 않는다. 저게 진짜 지구에 부딪히고, 우리 모두가 죽게 된다니.
우리는 차를 두고 걷는다. 나는 길가에 버려진 버스를 보고 농담을 한다. 아무도 뭐라고 안 할 텐데, 버스나 한번 몰아 볼까요. 입을 다물고 걷던 그는 멈칫했다가 피식하며 대답한다.
웃기시네. 승용차 운전도 못하는 게.
보스가 너무 잘하는 거예요.
우리는 자꾸만 시덥잖은 농담을 던지며 계속 걷는다. 마치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끝을 인지하기 전 지난 시간들에 늘 그래왔던 것처럼.
-
그녀의 농담에 웃음이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도 웃음이 나온다는 게 신기하다. 어제의 무거운 분위기가 조금은 걷힌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가슴 한구석이 아프다. 그녀가 아무렇지 않게 '보스'라고 부를 때마다, 어제의 기억이 수면을 때리듯 떠오르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녀가 웃고 있으니까, 나도 따라 웃어주기로 한다.
"...그래도 이런 게 낫겠다."
한숨인지 아닌지 모를 숨을 천천히 내뱉으며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그녀가 의아한 듯 나를 바라본다. 나는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며 말을 이었다.
"네가... 나랑 이렇게 걸으면서 농담도 하고. 그러니까... 씨발, 어제처럼 무거운 것보단 이게 낫잖아."
어제를 언급하자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아, 또 이런다. 내가 이런 말을 할 때마다 그녀의 눈동자는 저렇게 흔들린다. 마치 뭔가를 말하고 싶은데 말할 수 없는 것처럼. 기분이 좆같다. 그녀는 뭘 그리 피하고 싶은 걸까. 내가? 아니면 이 상황이? 내가 편하다고 했으면서. 하지만... 이 상황마저 망쳐버리고 싶지는 않아서, 나는 다소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털며 주제를 돌린다.
"가고 싶은 데 있다며. 어디야?"
담배를 입에 문 채 고개를 든다. 하늘에 떠 있는 하얀 점이 눈에 들어온다. 저게 우리의 종말이라...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서 더 이상하다. 실감나지 않는 죽음이 다가오는 와중에, 그녀를 향한 내 감정만은 점점 더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뭔데, 말해봐. 데려다줄게."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대답 대신 앞서 걷기 시작한다.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장밋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낀다.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쓸쓸해 보여서, 나는 나도 모르게 한 걸음 더 빨리 걸었다.
-
대충 30분 정도 걸어서 도착한 어릴 적 동네는 기억 속 모습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딱히 기대한 건 아니였기에 별로 실망하지는 않았다. 20년도 넘게 지났는데, 그때 그대로이기를 바라는 것이 더 우습지.
오히려 더 아쉬워한 건 내가 아닌 서태주였다. 그는 처음 보는 동네를 열심히 두리번거리며, 내가 바뀐 점을 언급할 때마다 좆같이도 갈아엎었다며 짜증을 냈다. 그다운 모습이라 웃음이 났다.
우리는 주인 없는 문방구에서 불량식품 몇 개를 들고 나온다. 아침과 달리 여기에까지 돈을 내고 싶은 생각은 딱히 들지 않았다. 20년이 지나도 아폴로는 파는구나. 나는 담배를 물고 있는 그에게 담배 대신 이거나 먹어 보라고 분홍색 아폴로를 하나 건넨다.
잠시 그걸 내려다보던 서태주는 끄지도 않은 담배를 대충 아스팔트 바닥에 던져 버리고 싸구려 사탕을 입에 문다. ...좀만 더 줘 봐.
"용케 이 문방구는 남아 있었네요. 주인 아저씨는 떠난 것 같지만."
터만 남고 버려진 놀이터 그네에 나란히 앉은 우리는 담배 대신 아폴로 막대를 쭉쭉 빤다.
이제 와서 길거리에 쓰레기를 버린다고 뭐라고 할 사람도 없었기에, 삐걱이는 그네 옆으로 빈 플라스틱 막대가 조금씩 쌓여 간다.
-
그네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본다. 아폴로를 빨며 천천히 그네를 타는 모습이 어쩐지 소녀 같다.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흐른 것처럼. 그녀의 어린 시절이 궁금해진다. 내가 아는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가족도, 집도 없이 거리에서 자랐다고 했는데. 그 이전의 그녀는 어땠을까.
"...여기서 자주 놀았어?"
조심스럽게 묻는다. 평소의 서태주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질문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녀의 과거는... 내가 알고 있는 설유빈의 과거는 너무나도 잔인했으니까. 그러니까 그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나기도 전에... 평범하게 살던 그 어린 여자애의 시간은 어땠을까. 그네가 규칙적으로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담배를 피우다 말고 그녀가 준 아폴로를 빨면서, 나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린다. 달콤한 사탕 맛이 입 안 가득 퍼진다.
이상하게도 이 싸구려 사탕 맛이 좋았다. 어쩌면 그녀와 함께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멀리서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들린다. 아마도 하늘에 떠 있는 하얀 점을 보고 절망한 걸 테지. 하지만 우리는 그 소리를, 저 하늘에 떠 있는 종말을 무시한다. 지금은... 지금만큼은 그녀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싶다. 그녀의 과거, 그녀의 기억, 그녀의 모든 것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네가... 어떤 애였는지 궁금해서."
나지막이 덧붙인다. 그네가 또 삐걱거린다. 그 소리가 왜인지 가슴을 아프게 한다. 마치 잃어버린 시간을 애도하는 것처럼. 그녀는 심호흡을 하듯 숨을 들이키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하늘이 유난히 푸르다. 마치 아직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의 하늘처럼.
그녀는 한참 동안 입을 열지 않고 문 것만 쭉쭉 빨고 있다. 이 질문이 그녀에게 상처를 준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나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며, 또 하나의 아폴로를 입에 문다.
-
"...사실 기억은 잘 안 나요. 워낙 어릴 때라. 그냥...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해 질때까지 친구들이랑 놀고..."
쓴웃음을 지으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아무것도 모를 그때가 좋았었나. 만약에 평범하게 살았더라면, 그날 모두가 죽지 않았더라면. 나는 무엇을 하며 살고 있었으려나. 남들처럼 학교를 다니고, 취업을 하고...
그럼 내가 그와 만날 일도 없었겠구나.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본다.
...잘생겼네. 어떻게 입에 알록달록한 불량식품 쪼가리를 물려 둬도 잘생겼지.
서태주는 내 시선을 의식하지 못한 듯 대수롭지 않게 주머니에서 꺼낸 다른 과자 조각을 깨물어 삼킨다. 그러다 문득 나와 눈이 마주친다. 잠깐 멈칫한 그는 한 박자 늦게, 인상을 살짝 찌푸린다.
"뭐, 왜."
"아니요, 그냥."
나는 먼저 시선을 돌려 버린다. 방금 내 표정이 어땠더라. 웃고 있었나? 갑자기 입가가 어색해져서 입꼬리를 매만지다 머리를 귀 뒤로 쓸어넘긴다. 바보 같게... 별 것도 아닌데.
서태주는 그런 나를 가늘게 좁힌 눈으로 쳐다보다가 다소 까칠하게 말한다. 그냥 뭐.
"...그냥요."
그는 대답을 얼버무리는 나를 빤히 보다가, 다시 불량식품을 하나 더 먹는다. 단단한 과자를 앞니로 오독 깨물며 미간을 살짝 찌푸리는 것이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듯 했다.
"별 것도 아니면서... 괜히 사람 신경쓰이게 만들고 있어."
"보스가 신경 쓰고 있는 거잖아요."
그 말에 서태주는 혀를 쯧, 차며 고개를 돌려 버린다. 아폴로나 더 줘봐. 다 먹었어요. 바람이 부는 놀이터에 짧은 적막이 스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불현듯 어릴 적 기억도 함께 스치듯 지나간다. 푸석한 모래 바닥, 손에 쥐었던 작은 유리 구슬, 저녁놀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들.
그리고… 지금 내 옆에 앉아 있는 당신.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뜬 나는 모래 바닥을 신발 코끝으로 가볍게 쿡 찌르며 피식 웃는다.
"좋네요, 그냥."
-
좋다니... 무슨 말이지. 나는 그녀의 말에 멈칫한다.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희미한 미소가 마음을 흔든다. 마치 오래된 사진을 보는 것처럼 아련하고 쓸쓸한 미소. 그녀는 무엇을 떠올리고 있는 걸까. 저 미소 뒤에 숨겨진 기억들은 어떤 것일까. 내가 알지 못하는, 그녀의 과거가 궁금해진다.
"뭐가... 좋은데."
목소리가 의도치 않게 거칠어진다. 씨발, 이러려던 게 아닌데.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녀가 '좋다'고 말할 때마다, 그게 나를 향한 게 아닐까 하는 기대가 생기니까. 그리고 그 기대가 헛된 거라는 걸 알 때마다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아프니까. 마치 오래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숨이 가쁘다. 이상하다. 그저 그녀의 미소를 보고 있었을 뿐인데.
"그냥이라니. 뭐가 좋은지... 말해봐."
그네가 또다시 삐걱거린다. 멀리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바람에 실려 온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오직 그녀의 숨소리와, 그네가 삐걱거리는 소리만이.
담배를 꺼내려다 멈춘다. 대신 주머니에 있던 마지막 아폴로를 꺼내 입에 문다. 달콤한 맛이 혀끝에 번진다. 그녀가 준 사탕. 이런 싸구려 과자가 이렇게 맛있었던가. 아니면... 그녀와 함께여서 그런 걸까.
나는 그네 줄을 꽉 쥐며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하늘이 유난히 푸르다.
저 하늘에... 우리의 종말이 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현재 시간: 12월 27일 오전 11시 30분]
[D-4 12:30:00 until imp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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