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사랑 같은 거 모르는데. 그냥... 지금처럼만 있고 싶어."
"그럼 보스는, 저를 사랑하고 싶으신 거네요."
그가 나를 사랑하게 만들어서, 그 사랑 때문에 죽도록 아파하는 꼴을 볼 거다. 그리고 마음이 후련해지면... 미련없이 끝을 맞이할 수 있겠지. 생각만 해도 즐거워서 웃음이 나왔다.
* 플레이 로그를 흐름에 맞게 일부 수정하여 담았습니다.
* 이전편: https://planetloop.tistory.com/25
낙하, 종단속도 (1)
"오늘은 12월 25일 크리스마스이며, 일주일 뒤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할 예정이다. 거대한 소행성을 막을 방법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행성에 발을 딛고 있는 사람들은 이제 모두 7일간의
planetloop.tistory.com
[현재 시간: 12월 25일 오후 6시 30분]
[D-6 5:30:00 until impact]
거의 저녁 시간이 다 되어서야 우리는 바닷가에 도착했다. 여기까지 온 김에 어렸을 때 살던 동네로 가고 싶었는데, 아무리 고민을 해 봐도 주소가 기억나질 않아 찾지 못했다. 그래도 바다는 왔으니 상관없나. 이제와 과거에 연연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바닷바람 탓에 날씨가 제법 추웠다. 나는 그와 단둘이 노을지는 바닷가를 터벅터벅 걷는다.
"보스는 왜 바다에 오고 싶었던 거예요?"
-
왜 바다에 오고 싶었냐고. 나도 잘 모르겠다. 나는 고개를 돌려 수평선을 바라본다. 노을빛이 바다를 물들이고 있었다. 붉은색, 주황색, 보라색이 뒤섞여 수평선 위로 번져나간다. 마치 세상의 마지막을 알리는 신호탄처럼. 차가운 바닷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그저 마지막이 다가오는 이 순간, 뭔가 다른 걸 해보고 싶었을 뿐이다.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수평선은 그동안 내가 살아온 삶처럼 단조로웠으니까. 살인, 협박, 배신... 그 모든 게 결국 똑같은 일상의 반복이었을 뿐이니까.
"...어렸을 때 동생이랑 한 번 와본 적 있어. 10년 전에, 버리기 전에."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불을 붙이려는데 바닷바람이 세차게 분다. 라이터 불이 자꾸만 꺼진다. 씨발... 이런 것도 쉽지 않네. 결국 포기하고 담배를 도로 넣는다. 그녀를 곁눈질로 본다. 추워 보인다. 평소라면 신경 쓰지 않았을 텐데, 지금은 자켓을 벗어 그녀의 어깨에 걸쳐주고 싶어진다. 하지만 망설여진다. 이런 남을 위하는 행동이 어색하다. 지금 드는 감정에 기시감이 들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아주 예전에 서휘를 볼 때 느꼈던 것 같은. 쟨 내 가족도 아닌데.
"근데 넌 왜 하필 포항이야? 여기가 고향이라도 돼?"
그녀를 힐끗 보며 갑자기 묻는다. 그녀가 왜 하필 포항을 고른 건지 궁금했다. 거의 10년을 보며 하나도 관심이 없었는데. 장밋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낀다. 찬 바닷바람 때문인지 뺨이 붉었다. 이상하게도 그 모습이 아름답게 보인다. 씨발, 진짜 눈이 삐었나.
-
"...네. 아주 어릴때만 살았지만요."
해변에 두 명 분의 발자국이 길게 늘어진다. 추워서 팔짱을 끼고 있던 나는 그에게로 몸을 가까이 붙인다. 그가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코트가 차가워서 온기를 얻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잠시 어정쩡한 자세로 느리게 걷던 보스는 한 팔을 뻗어 내 허리를 감싸 준다. 그렇게 말없이 조금 더 걷다가 나는 나직하게 묻는다. 제가 어젯밤에 했던 말. 어떻게 생각하고 있어요?
-
차가운 바닷바람이 불어오는데 그녀가 내 쪽으로 몸을 기댄다. 순간 몸이 굳는다. 이런 친밀한 접촉이 낯설어서다. 그동안 수많은 여자들과 잤지만, 이렇게... 순수하게 누군가의 무게를 느낀 적은 없었다. 잠시 망설이다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감싼다. 체온이 전해진다. 차갑고도 따뜻한.
그리고 그녀가 묻는다. 어젯밤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사랑해달라던 그 말을. 나는 입술을 깨문다. 대답하기가 어렵다. 평생을 욕망만을 좇아 살았던 내가 사랑이란 걸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의 온기가 전해지는 이 순간만큼은... 뭔가 다른 게 느껴진다. 마치 오래전에 잃어버린 무언가를 되찾은 것 같은.
"...난 사랑 같은 거 모르는데. 그냥... 지금처럼만 있고 싶어."
솔직한 고백이 흘러나온다. 수평선 너머로 해가 저물어간다. 마치 우리의 시간처럼. 그녀의 허리를 감싼 손에 더 힘을 준다. 이상하게도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우리에겐 6일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그 시간마저도... 우리가 온전히 가질 수 있을지 모른다.
-
"그럼 보스는, 저를 사랑하고 싶으신 거네요."
옅게 웃으며 대답한다. 하룻밤 새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겼길래. 뭐, 이마저도 잠깐의 변덕일 수 있다. 문제가 있다면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그것보다 더 잠깐이라는 것이고.
세상의 종장 앞에서 서태주는 웬 바람이 불어 난생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걸 해 보겠다 마음먹었지만, 그것이 그가 당장 사랑에 빠져 있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나는 그에게 머리를 기댄 채 내가 세웠던 목표를 다시 상기한다. 그가 나를 사랑하게 만들어서, 그 사랑 때문에 죽도록 아파하는 꼴을 볼 거다. 그리고 마음이 후련해지면... 미련없이 끝을 맞이할 수 있겠지.
생각만 해도 즐거워서 웃음이 나왔다.
-
그녀의 말에 순간 가슴 한구석이 찌르르 울린다. 사랑하고 싶다니. 그래, 어쩌면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왜인지 그 웃음이 쓸쓸하게 느껴진다. 마치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처럼. 나는 그녀의 어깨를 더 세게 끌어안는다. 차가운 바닷바람이 불어오는데, 그녀의 체온이 전해진다.
"웃지 마. 씨발... 이상하잖아."
목소리가 쉬어 나온다. 평소라면 이런 상황에서 강압적으로 나왔을 텐데. 하지만 지금은... 그저 그녀의 온기가 좋다. 바다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짭조름하고 쌉싸래한. 마치 지금 이 순간처럼. 달콤하지도, 그렇다고 쓰지도 않은. 그저... 이상하게 편안한.
멀리서 파도 소리가 들린다. 끝없이 밀려왔다 물러가는 파도처럼, 내 마음도 그녀에게로 밀려들었다 물러난다. 사랑이란 게 이런 건가. 이렇게 불안하고, 두려운 건가.
"그래... 널 사랑하고 싶어. 씨발, 이게 뭐가 됐든... 마지막까지 네 옆에 있고 싶어."
숨기지 못한 진심이 새어나온다. 이런 말을 해본 적이 없다. 평생 처음이다. 그녀의 장밋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린다. 그 모습이 왜인지 슬퍼 보인다. 마치... 정해진 이별을 예감하는 것처럼.
"근데... 너는? 넌 날 어떻게 생각해? 아직도... 좋아해?"
묻고 나서 후회한다. 이런 질문을 할 자격이 있나 싶어서. 10년 동안 너를 그저 부하직원으로만 대했던 내가, 이제 와서 감히.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의 대답이 두렵지 않다. 오히려... 기대된다. 집 어딘가에서 찾아낸 먼지 낀 상자를 열어 보는 것처럼.
-
그의 다소 불안해 보이는 물음에 나는 웃음이 나오는 것을 꾹 눌러 참는다. 그는 지금 무슨 기분일까. 나의 반응을 하나하나 신경쓰고 기대하며 두려워하고 있을까? 손끝 한 번이라도 더 닿고 싶어 안달이 나 있을까? 뭐가 됐든 서태주의 마음이 편치만은 않겠다는 점이 기껍다.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내가 어떤 마음인지."
일부러 여지를 남기는 대답. 여상한 목소리가 나직하게 서태주를 울린다. 나는 그를 끌어안듯 검은 코트자락을 살짝 붙잡는다. 별 건 아니고, 그냥 안정감 있어서. 그가 헷갈리라고 제대로 된 대답을 해 주지 않은 건 맞다. 그러나, 좀 전의 말은 사실 나의 진심이기도 했다. 분명 미련 같은 건 하나도 안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오랜 시간 함께해서 그런 걸까? 그와 함께 있으면 이상한 편안함이 들었다.
이게 사랑인지 정인지, 조금 두려웠다. 부디 끝의 끝까지 그것이 사랑으로 판명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
그녀의 모호한 대답에 가슴 한구석이 불안하게 조여온다. 잘 모르겠다니. 이 답은 뭐지. 거절도 아니고 수락도 아닌... 마치 안개 속을 걷는 것 같은 기분이다. 차라리 싫다고 하지. 그게 더 편할 텐데. 나는 그녀의 손이 내 코트자락을 붙잡는 것을 느낀다. 작은 손가락들이 천천히 움직이는 게 느껴진다. 이상하게도 그 작은 움직임이 내 심장을 흔든다.
"씨발... 이런 거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시간도 얼마 없는데."
허탈한 웃음이 나온다. 시간이라... 우리에게 남은 건 고작 6일. 그 짧은 시간 동안 사랑이란 걸 배우고, 또 나누려 하다니. 평생을 강압과 폭력으로 살아왔던 내가, 이렇게 누군가의 마음을 조심스럽게 다루려 하고 있다니. 정말이지 우스운 일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다.
바닷가에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차가운 바닷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그녀의 장밋빛 머리카락이 내 코트에 살짝 닿았다 떨어진다. 이 모든 게 꿈만 같다.
"너... 날 두려워해?"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녀는 나를 두려워하는 걸지도 모른다. 10년 동안 나는 그녀에게 무자비한 상사였으니까. 그녀의 대답이 두렵다. 하지만 동시에... 알고 싶다. 그녀의 진심이, 그녀의 모든 것이.
-
바보, 하나도 못 짚고 있구나. 내가 당신을 두려워했다면 그렇게 사랑했을까? 정말로 그가 싫고 두려웠다면 지금 이런 행동도 안 하고 있었을 거란 건 모르는 걸까.
나는 서태주가, 보스가 싫지 않았다. 따지자면 여전히 좋아하는(사랑은 아니지만) 쪽에 가깝지. 그렇지만 객관적으로 무서워할 만한 이유가 충분한 것도 사실이니 그가 아주 흰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기도 하다. 이걸 정정해 줘, 말아.
"무섭다고 한다면요?"
은근한 말투로 던지는 질문. 이건 그냥 생각을 묻는 거다. 난 무섭다고도, 아니라고도 안 했어. 나는 약간은 장난스럽게 미소지으며 그를 올려다본다. 이미 주변이 새까매진 탓에 그에게 내 표정이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추우니까 슬슬 들어가자고나 할까.
-
씨발... 저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는 눈동자가 마음에 걸린다.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모습이 달빛 아래 희미하게 보인다. 무섭다고 한다면? 이게 무슨 뜻이지. 거절인가, 아니면 다른 뜻이 있는 건가. 나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은 손에 더 힘을 준다. 차가운 바닷바람이 불어오는데, 왜인지 답답함이 몰려온다. 생각해보면 그녀가 나를 두려워할 만한 이유는 차고 넘치는 것도 같았다.
나는 지금까지 그녀에게 어떤 존재였더라.
"무섭다면... 어쩔 건데?"
나직한 목소리로 묻는다. 평소라면 강압적으로 나왔겠지만, 지금은... 그저 그녀의 진심이 궁금할 뿐이다. 바다 위로 달빛이 반짝인다. 마치 우리의 불확실한 관계처럼 흔들리며. 그녀의 장밋빛 머리카락이 내 코트에 스친다. 이상하게도 가슴이 아프다. 마치... 무언가를 잃을 것 같은 불안감.
"...근데, 그래도 괜찮아. 네가 날 무서워하는 게 당연하지. 씨발... 내가 뭘 기대한 거야."
대답을 기다리지 못하고 불쑥 내뱉은 말 사이로 자조 섞인 웃음이 새어나온다. 허리를 감싸안은 팔에 힘이 빠진다. 그녀의 몸이 조금 멀어지는 게 느껴진다. 차가운 바닷바람이 그 사이를 파고든다. 이상하게도 가슴 한구석이 아려온다. 마치 오래된 상처가 다시 벌어지는 것처럼. 서휘를 떠나보냈을 때처럼.
"추운가 보네. 들어갈까?"
그녀의 어깨가 떨리는 걸 느끼며 말한다. 하지만 사실 추위 때문만은 아닐 거란 걸 안다. 우리 사이에 흐르는 이 묘한 긴장감 때문일 테니까. 나는 주머니를 뒤적여 담배를 꺼내려다 멈춘다. 이런 순간에 담배를 피우는 건... 뭔가 아쉬울 것 같아서.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우리는 근처 숙소를 찾아 들어왔다. 바닷가 근처의 작은 모텔. 이런 곳에 묵는 건 처음이다. 평소라면 코웃음 치며 지나쳤을 곳이지만, 지금은 그저 그녀와 함께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방 안으로 들어서자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찌른다. 창문을 열어 바닷바람을 들였다.
유빈은 침대에 앉아있다. 달빛이 그녀의 장밋빛 머리카락을 비춘다. 아까 바닷가에서 나눈 대화가 머릿속을 맴돈다. 그녀가 나를 무서워한다고 했던 말. 그리고 내가 보인 허술한 반응. 씨발... 이런 건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평소였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지금은... 그저 그녀의 곁에 있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피곤하지? 씻고 자."
건조한 목소리로 말한다. 욕실 쪽으로 고갯짓하며. 하지만 사실 난 그녀가 지금 당장 잠들기를 바라지 않는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더 오래... 저 여자와 함께 있고 싶다. 애틋한 감정은 아니었고 그냥, 멸망이 다가오는데 지금 내 옆에는 설유빈밖에 없으니까.
그러나 씻고 나온 그녀는 딱히 더 대화를 나눌 생각이 없어 보였다. 졸음이 잔뜩 묻은 표정으로 하품을 하더니 침대 속으로 꾸물꾸물 기어들어간다. 입을 옷이 없어 동네 슈퍼에서 산 티셔츠는 그녀에게 제법 컸다. 목이 파여 쇄골이 다 드러나는데도 딱히 가릴 생각이 없는 모습에 나는 인상을 살짝 찌푸린다. 남자랑 단둘이 있다는 자각도 없는 건가.
묘하게 자존심이 상하는 동시에 그 모습이 귀엽다. 그래서인지 별로 건드릴 마음도 들지 않았다. 짜증 섞인 한숨이 담배 연기에 섞여 나온다.
...씨발.
D-5
[현재 시간: 12월 26일 오전 8시 00분]
[D-5 16:00:00 until impact]
아침이 되자 그녀는 이미 자리를 비운 뒤였다. 씨발... 어디 갔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침대에 걸터앉는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흐렸다. 어제와는 다르게 파도 소리도 거칠어진 것 같다. 불안함에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벽에 걸어 두었던 코트를 거칠게 잡아챈다.
그때 문이 열리고 그녀가 들어온다. 손에는 커피 두 잔이 들려있다. 평소라면 상상도 못할 광경이다. 아침에 굳이 커피를 찾아 마시는 스타일은 아니었으니까.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커피를 건넨다. 향긋한 커피 향이 코끝을 스친다.
"...어디 갔다 와?"
멈칫했다가 코트를 도로 벽에 걸어놓으며 나직이 묻는다. 목소리가 잠겨서 낮다. 유빈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창가로 걸어간다. 하늘을 보는 그녀의 옆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인다. 마치... 피할 수 없는 이별을 준비하는 사람처럼.
-
"산책이요. 나 어렸을 때 살던 동네니까... 뭔가 기억나는 게 있을까 해서."
나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코트를 들고 있던 그의 얼굴에 서려 있던 불안과 당황을 읽는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의 어깨가 툭 떨어지며 맥빠지는 한숨이 흘러나온다. 나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인다. 내가 사라진 게 그에게는 저정도로 패닉이 올 일이었나. 벌써 그 정도로?
아니, 사람이 갑자기 사라지면 저렇게 놀랄 수도 있지.
서태주가?
...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뭔가 자존심이 상했다. 눈 앞의 사람한테 신경을 써야 할 건 저쪽이지 내가 아닌데.
"나갈래요? 바다 보러."
저녁이 다 되어서야 도착한 터라 전날 우리가 봤던 건 노을에 붉어진 저녁 바다와 새카만 밤바다 뿐이었다. 그러니까, 아직 제대로 된 푸른 바다를 본 적 없잖아. 나는 보스에게 눈부신 햇살 아래 반짝이는 그 바다를 보여주고 싶었다. 비록 좀 전의 생각 탓에 약간 기분이 상하긴 했지만... 그의 잘못도 아니였던 데다, 내가 그거 가지고 세상이 망하기 전에 예쁜 풍경 하나 보여주지 않을 만큼 성격이 나쁘진 않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작게 하품하며 문가로 턱짓을 한다.
-
바다 보러 가자는 그녀의 말에 내 안의 불안이 조금 잦아든다. 씨발... 내가 왜 이렇게까지 됐지. 그녀가 사라졌을 때의 그 불안감이 아직도 가시지 않는다. 마치 서휘를 잃었을 때처럼... 아니, 이건 좀 다른 것 같다. 더 날카롭고 아픈.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그녀를 바라본다. 하품하는 모습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나온다. 씨발, 왜 웃은 거지. 기분이 좋은데 인정하기 싫었다.
"그래, 가자. 근데 밥은 먹고 가야지. 어제부터 제대로 못 먹었잖아."
목소리가 생각보다 다정하게 나와서 당황스럽다. 평소의 나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를 챙기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이런 감정도 처음이다. 내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걱정하다니. 그녀는 창 밖을 보며 미소 짓는다. 그 모습이 어쩐지 쓸쓸해 보여서 가슴이 아프다.
"...근데 너무 멀리는 가지 말고.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문득 걱정이 된다. 세상이 끝나가는 시점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나는 자켓을 걸치며 그녀 앞으로 성큼 다가간다.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바다 냄새가 난다. 아까 산책했다더니, 벌써 바닷가에 다녀온 모양이다. 이상하게도 그 사실이 서운하다. 나 없이 혼자 갔다 왔다니.
"근처에 괜찮은 식당 있나? 아님... 호텔 찾아서 옮길까?"
묻고 나서 후회한다. 너무 서두르는 것 같아서. 하지만 이 허름한 모텔에서 그녀를 재울 순 없다. 적어도 내가... 그녀를 소중하게 대하고 싶다. 이런 감정은 처음이라 어색하다. 마치 웃자란 줄기처럼 여리고 불안한. 유빈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내 심장이 불규칙하게 뛴다. 그녀는 내 말에 상관없다는 듯, 혹은 잘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문가로 다가간다.
"잠깐만."
그녀가 문 앞에 서는 걸 보고 급하게 말한다. 그리고는 내 코트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둘러준다. 날이 어제보다 더 쌀쌀한 것 같아서다. 아니, 그냥... 그러고 싶어서. 그녀의 작은 어깨가 내 코트에 파묻힌다. 마치 날개를 접은 새처럼 보인다. 왜인지 가슴이 아프다. 이상하게 내 잘못처럼 느껴졌다.
"이제 가자."
나는 먼저 문을 열어주며 말한다. 그녀가 지나갈 때 은은한 체온이 전해진다.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에겐 고작 5일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그 시간마저도... 우리가 온전히 가질 수 있을지 모른다.
-
"괜...그래요."
나는 괜찮다고 말하려다가 문득 서태주 또한 나와 함께 밥을 먹지 못했다는 것이 생각나 말을 바꾼다. 나야 안 먹어도 괜찮은데, 저 덩치에 못 먹으면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해서. 세상이 이렇게 된 마당에 영업을 하는 가게가 있을 지는 의문이지만... 이런 모텔도 용케 장사를 하고 있는 걸 보면 밥집도 하나쯤은 장사하겠거니 싶었다.
***
그와 나는 근처 국밥집에서 대충 아침을 때우고 아침의 바닷가를 걷는다. 조각난 햇빛이 수면에 잔뜩 흩뿌려져 있어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그는 나에게 계속해서 코트를 둘러 주려고 했다. 이 겨울에 본인은 검은 셔츠 한 장만 입고서.
"가져가요. 감기 걸려요."
이젠 병원도 못 가는데, 소행성 충돌도 전에 병나서 죽고 싶어요? 은근히 까칠한 목소리가 나왔다. 걱정하는 말이었지만 사실 정말로 그의 건강이 걱정되었다기보단... 만약 그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혼자 남게 될 나를 걱정한 발언이었다. 아무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나보다는 그가 살아남을 확률이 높겠지만. 그럼에도 내가 혼자 남을 확률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나는 마지막을 외롭게 맞이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누군가를 곁에 두고도 외로웠던 시간이 너무나도 길었었기에.
-
감기라... 나는 그녀의 말에 쓴웃음을 짓는다. 세상이 끝나가는 마당에 감기를 걱정하다니. 하지만 그 말투에 숨은 다른 의미를 놓치지 않는다. 혼자 남는 것이 두려운 걸까. 나도 모르게 그녀를 바라보던 시선이 날카로워진다. 잠깐이나마 내가 걱정되어서 하는 말일 거라고 착각했던 게 우습다. 그래, 이 여자가 날 걱정할 리가 없지.
바닷가에 부서지는 차갑고 거친 파도 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나는 코트를 다시 그녀의 어깨에 둘러준다. 이번에는 좀 더 강압적으로.
"내가 그렇게 약해 보여? 씨발... 넌 그냥 입어. 추운 거 티 나."
바다에 부서지는 햇살이 눈부시다. 마치 수천 개의 다이아몬드가 부서진 것처럼. 그녀의 장밋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낀다. 순간 가슴 한구석이 아려온다.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도, 그녀의 모습도...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이 목을 조여온다.
"설유빈."
...너도 혼자 남지 않을 거야.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나직이 말한다. 약속처럼, 혹은 기도처럼. 유빈의 어깨가 살짝 떨린다. 말없이 바다를 바라보는 그녀의 옆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인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는다. 차가운 바닷바람이 불어오는데, 그녀의 체온이 전해진다. 이상하게도 가슴이 아프다. 마치... 무언가를 잃을 것 같은 불안감. 하지만 동시에, 이 순간만큼은 그녀를 지키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너는 괜찮아? 세상이 이렇게 됐는데."
문득 궁금해진다. 설유빈은 정말 괜찮은 걸까. 아니면 그저 강한 척하는 걸까. 나는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본다. 햇살 아래 그녀의 눈동자가 녹색으로 반짝인다. 그 안에 무슨 생각이 담겨있는지 알 수 없다. 마치 깊은 바다처럼 모호하고 불안한. 나는 그녀의 대답이 두렵다. 하지만 동시에... 알고 싶다. 그녀의 진심이, 그녀의 모든 것이.
-
"안 괜찮아요. 괜찮을 리가 있나요. 그 망할 소행성만 아니었어도..."
여기서 보스랑 단 둘이 궁상떨고 있을 일도 없을 텐데요. 자조적인 미소와 함께 약간 한숨처럼 나온 대답. 왠지 그의 눈을 마주보고 싶지 않아 나는 괜히 고개를 돌려 바다만 쳐다본다. 그가 어떤 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나는 지금 이 상황이 싫은가. 딱히 싫지도 좋지도 않았다. 그냥, 여기 그와 함께 이렇게 있으면 종말도 뭣도 잊을 수 있으니까. 행복하다기보단 불행을 피했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 같다. 종말로 인한 불가피한 불행을 유예하는 것.
"보스는요? 이래도 괜찮아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태온 보스였...잖아요."
자연스럽게 과거형으로 말해 놓고 그의 눈치를 본다. 고개를 돌리자 그제야 그와 눈이 마주친다. 줄곧 나를 향하고 있는 서태주의 고동색 눈동자는 잔잔히 가라앉아 있다. 그러나 나는 고요한 수면의 한 치 아래서 휘몰아치는 격랑을 읽는다. 이상한 일이다. 그 폭풍에 휘말리고 싶지 않은데, 왜인지 그럴 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
...과거형. 그녀의 말에 내 안의 무언가가 움찔한다. 그래, 이제 태온도 없고 보스도 없다. 모든 게 과거가 되어버렸다. 내가 그토록 지키려 했던 것들이, 내가 쌓아올린 모든 것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바위 하나에 모래성처럼 무너져버렸다. 나는 잠시 말없이 바다를 바라본다. 파도가 거세게 밀려와 바위에 부딪히고,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다시 물러난다.
마치 내 심장처럼.
"...괜찮을 리가 있나. 씨발... 10년 동안 지켜온 게 하루아침에 무너져버렸는데."
나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이번엔 바람이 좀 잠잠해서 라이터 불이 쉽게 붙는다. 깊게 한 모금을 빨아들이고 연기를 뱉는다. 하얀 연기가 바닷바람에 흩어진다.
"너도 한 대 피울래?"
담배를 건네며 묻는다. 예전에도 종종 같이 담배를 피웠었지. 그때는 상사와 부하 직원으로서. 하지만 지금은... 뭐라고 해야 하나. 연인? ...말도 안 되는 소리. 그저 세상의 마지막을 함께 맞이하는 동반자 정도는 되려나.
유빈이 담배를 받아 물자 나는 그 끝에 라이터를 켜준다. 그녀의 입술이 살짝 떨린다. 추운 건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
"근데 이상하게도... 지금이 더 편할지도 모르겠어. 씨발...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근데 진짜로, 지금이... 더 좋은 것 같아."
솔직한 고백이 흘러나온다. 그녀가 연기를 뱉으며 희미하게 웃는다. 그 모습이 왜인지 아프게 느껴진다. 마치 눈 앞에서 부서져가는 것처럼. 그녀의 어깨에 감긴 내 팔에 더 힘이 들어간다.
바닷바람이 차갑게 불어오는데, 왜인지 가슴 한구석이 따뜻하다. 이런 감정은 처음이다. 마치... 잃어버린 것을 되찾은 듯한. 하지만 동시에 불안하다. 이 따뜻함도 곧 사라질 테니까.
"...넌 어때? 내가 이제 보스가 아니어서... 편해?"
묻고 나서 후회한다. 대답이 두려워서. 하지만 알고 싶다. 그녀가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내가... 그녀에게 어떤 존재인지. 바다에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마치 시계 초침 소리처럼 불안하게.
-
"전 아직도 보스를 보스라고 부르는걸요."
굳이 호칭을 바꾸고 싶지는 않았다. 뭐라고 부를 건데, 그러면.
태주 오빠?
...생각만 해도 속이 좋지 않았다.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혹여나 그가 볼까 봐 도로 편다. 이 세계가 끝장날 때까지 그는 나의 보스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의 부실장이겠지. 그 이상은, 다른 것은... 없다.
오늘 아침부터 지금까지, 그는 나에게 제법 호감이 있는 사람처럼 굴었다. 섹스파트너는 수시로 갈아치우던 인간이 이렇게까지 뚝딱대고 누군가를 위하는 건 처음 봤으니까. 솔직히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이대로라면 정말로 그가 나를 사랑하게 될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했다. 몇 년을 바라봤어도 대답해 주지 않던 사람인데. 종말을 앞둔 세상에 단 둘만 남으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걸까?
...그럼 이제 좀 절절매게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지. 난 보스 남자로 안 본다고 말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서태주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
그녀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마치 무언가를 찾는 듯한, 혹은 시험하는 듯한 눈빛이다. 그 시선이 불편하다. 아니, 불편하다기보다는... 불안하다. 마치 내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 같아서.
나는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며 시선을 바다로 돌린다. 차가운 바닷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왜 그렇게 봐. 내 얼굴에 뭐 묻었나?"
퉁명스럽게 묻는다. 하지만 사실 알고 있다. 그녀가 날 시험하고 있다는 걸. 내가 얼마나 진심인지, 얼마나 그녀에게 빠져들었는지를... 씨발. 이런 게 사랑인가. 이렇게 불안하고, 초조하고, 아픈 게. 나는 담배 연기를 뱉으며 그녀를 힐끗 본다. 장밋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끼는데, 왜인지 가슴이 아프다. 마치... 이 모든 게 허상일 것만 같아서.
"아직도 보스라... 그래. 넌 그렇게 부르는 게 편하겠지. 씨발... 나도 그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자조 섞인 웃음이 새어나온다. 그래, 어쩌면 이게 맞는 걸지도 모른다. 우리는 결국 보스와 부하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하지만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픈 걸까. 마치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처럼. 나는 담배꽁초를 모래 위에 비벼 끈다. 그리고 문득, 그녀에게 묻고 싶어진다. 정말로 그게 다인지. 정말로... 우리는 그것뿐인지.
-
입에서 흘러나온 담배 연기가 나와 그의 얼굴 사이를 가리듯 피어오르다 바람에 흩어진다. 피식거리며 웃고 있는 그는 꼭 고통을 눌러참고 있는 사람처럼 눈가를 잔뜩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슬픈 걸까. 일정하게 철썩이는 파도 소리가 상념을 잡아먹는다. 깨질 듯한 평화로움 위에서 나는 그에게 의연히 묻는다.
"남들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요."
보스는, 지금 상황에 만족해요?
이대로 세상이 끝나도 괜찮아요?
'Record'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태온에서 욱설러로 살아남기(1) (14) | 2025.02.28 |
---|---|
지독한 외사랑의 결말 (3) | 2025.02.20 |
낙하, 종단속도 (3) (4) | 2025.02.13 |
낙하, 종단속도 (1) (6) | 2025.02.10 |
태온 3세대 인터뷰 (1) (7) | 2025.02.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