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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하, 종단속도 (1)

설유빈 2025. 2. 10. 11:24
"오늘은 12월 25일 크리스마스이며, 일주일 뒤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할 예정이다. 거대한 소행성을 막을 방법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행성에 발을 딛고 있는 사람들은 이제 모두 7일간의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되었다."

- 시작 설정 中 -

 

 "그러니까, 세상이 망하기 전에...나를 사랑해주세요."

 보스가 나를 사랑하게 됐으면 좋겠어요. 그걸 원해요. 그는 후회를 물었지만 나는 소망을 답했다.

 
 
* 서태주 1:1 로그

* 플레이 로그를 흐름에 맞게 일부 수정하여 담았습니다.
* '사먁' 님의 커스텀 설정 '소행성 충돌까지 남은 시간 일주일' 로 플레이하였습니다. 
(링크: https://foxpannec.tistory.com/9)

 

소행성 충돌까지 남은 시간 일주일

(만들어주신 해랑님 너무 감사합니다.)당신은 7일 후 세상이 멸망한다면 무엇을 하고 싶나요?유저노트백서진 추천 문체#은희경 작가의 문체로, 백서진의 1인칭 시점에서 글을 극도로 풍부하고

foxpannec.tistory.com

 

User | 설유빈
태온의 부실장. 과거에 서태주를 꽤 오래도록 짝사랑했으나 이제는 접은 지도 한참이다. 어디 남자가 없어 그런 남자를 좋아했었을까. 내가 미쳤지.
이제는 미련 한 줌 남지 않았고, 한때의 흑역사로 치부해 덮어 버렸기에 죽을 때까지 누구도 모를 사실이다. 분명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일주일 뒤에 세상이 망한다니까 그런 흑역사가 있다는 것마저 조금 억울해졌다. 저 괘씸한 에고이스트가 사랑 때문에 아파하는 꼴은 본 다음에 죽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게 나 때문이었으면 좋겠다.

#D-6

 
[현재 시간: 12월 25일 오전 12시 00분]
[D-7 00:00:00 until impact]

 
 나는 크리스마스로 넘어가는 자정, 캐롤이 뚝 멈춰 버린 광장의 거대한 스크린을 멍하니 올려다본다. 스크린에는 흐릿한 불덩이같은 사진과 함께 '소행성 충돌 예정' 이라는 문구가 번쩍이고 있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믿을 수 없는 소식에 비명을 지르거나 자리에 주저앉고, 더러는 울부짖으며 화를 낸다. 화면 속 아나운서가 다급하게 소식을 전한다. 그 반대쪽 스크린으로는 저명한 천문물리학자라는 사람이 덜덜 떨며 무어라 이야기하는 내용이 송출되고 있다. 그러나 내 귀에는 그 중 무엇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다.

 나는 고개를 돌려 내 옆에 있는 이를 본다. 서태주 또한 스크린을 보고 있다.
 
 
***
 

 대충 한 시간쯤 전. 태온 본부의 지하주차장은 한산했다. 꼴에 내일이 크리스마스라고 다들 일찍 집에 가 버린 탓이다. 나는 미팅 때문에 이 시간까지 붙들려 있었는데... 다 일중독 실장 때문이지. 속으로 궁시렁거리며 차키를 꺼내는데, 뒤에서 서태주가 나를 불렀다. 눈도 내리는데 태워다 준다나. 됐다는 거절에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 서 있던 그는 피식 웃으며 돌아섰다. 싫음 말고. 그냥 던져 봤다는 식의 태도가 묘하게 신경쓰였다. ...딴데 안 들를 거죠?

 눈이 내려서인지, 크리스마스 이브여서인지는 몰라도 차가 제법 막혔다. 서태주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핸들을 툭툭 두드린다. 한숨처럼 흘러나온 담배 연기가 조용한 차 안에 가라앉는다. 씨발, 이 정도면 걸어가는 게 낫겠네. 그의 말에 나는 무심하게 답한다. 태워준다고 한 건 보스잖아요. 길 옆의 광장에서는 계속해서 캐롤이 울리고 있고,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 아래 사람들이 잔뜩 모여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다. 차창 밖을 바라보는 나를 잠시 응시하던 서태주는 불쑥 말을 꺼낸다. 보고 갈래?

그리고 지금. 나는 스크린을 올려다보며 멍하니 중얼거린다.
 
"...뭐야, 이거."
 
-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며 거대 스크린을 올려다본다. 눈발이 소란스럽게 휘날리는 광장. 비명과 울음소리가 뒤섞인 인파 사이로 캐롤이 흘러나오다 뚝 끊긴다. 내 옆자리에 앉은 설유빈이 작게 중얼거린 말에 나는 피식 웃음이 난다.

 "뭐긴 뭐야. 씨발, 죽음 통지서지."

 담배를 차창 밖으로 던진다. 광장의 스크린에서는 계속해서 붉은색 경고등이 번쩍이고 있다. 이제 7일 후면 모든 게 끝이라고.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한다고. 계속해서 종말을 외치고 있다.

 "...재미있네. 태온을 키우느라 10년을 바쳤더니, 이제 와서 이런 개같은 소리나 듣고."

 차 안은 침묵에 잠긴다. 나는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준다. 그녀의 작은 얼굴이 스크린의 붉은 빛에 물들어 있다.

 "...가지 말까?"
 
-
 
 "...그럼 어디로 가요?"

 나는 그를 빤히 바라본다. 바깥은 아수라장. 7일 뒤에 세계가 멸망한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끝이 도래할 때까지 난 뭘 할 수 있지. 세상은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조직이고 나발이고 아무것도 안 남겠지. 가족이 없기에 보고 싶은 사람도 없었고, 바라는 것을 고민해본 적이 별로 없기에 해 보고 싶은 것도 딱히 없다. 세상이 망할 테니 이제 내게 일을 시킬 사람도 없겠지.

 
 그렇다면 나는... 지금부터 무엇을 해야 하지.

-
 
 나는 운전대를 잡은 채 잠시 생각에 잠긴다. 옆자리의 그녀가 던진 질문이 차 안에 맴돈다. 어디로 가냐고? 씨발, 나도 모르지. 지금 이 순간 내가 알 수 있는 건 단 하나. 이대로는 끝내기 싫다는 것.

 "...호텔이나 갈까?"

 내가 던진 말에 그녀가 미묘한 표정을 짓는다. 나는 피식 웃으며 차를 출발시킨다.
 
 "걱정 마. 그냥 술이나 마시러 가는 거야. 7일 뒤면 다 죽을 텐데, 마지막으로 비싼 술이나 실컷 마시면서 태온 자금 좀 써보자고."
 
 광장의 혼돈이 백미러에 잡힌다. 사람들은 여전히 비명을 지르거나 울부짖고 있다. 나는 그들의 모습이 가소롭다. 인생이란 게 원래 언젠가는 끝날 텐데, 7일 뒤라는 시한부 통보를 받았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난리를 칠 일인가.
 
 "어차피 죽을 거, 뭐라도 해보고 싶은 거 없어?"

 물음을 던지며 그녀를 흘깃 본다. 설유빈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묘한 표정이 남아있다. 나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진다.
 
-
 
"...딱히 없어요. 생각해본 적도 없고. 보스는요?"

 하고 싶은 것이라. 내가 좆같은 조직에서 아득바득 살아남고 반항하는 것들을 죄 밟아 가며 여기까지 올라온 건, 그냥 하기 싫은 것을 안 하기 위함이었다. 하고 싶은 건... 딱히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
 
 내가 뭘 하고 싶지. 어떤 걸 좋아하더라.
 
 생각나는 것이 없다는 사실 자체가 기분이 나빠져 나는 담배를 꺼냈다. 서태주가 차 안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라이터를 켜는 내 모습을 잠시 쳐다보자 나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대꾸한다. 어차피 보스도 맨날 차 안에서 피잖아요.

-
 
 그녀가 피우는 담배 연기가 차 안을 채운다. 나는 그녀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다. 하고 싶은 게 없다고? 그녀답다. 태온의 부실장이 되기까지, 그녀는 언제나 냉정하고 이성적이었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욕망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신뢰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그녀가 왠지 허전하게만 느껴진다.

 "나? ...글쎄."
 
 차창 밖으로 눈발이 휘날린다. 도시의 불빛이 하얀 눈발 사이로 번져간다. 나는 천천히 말을 이어간다.
 
 "난 10년 전에 동생을 버리고 왔어. 그 새끼가 조직에 휘말리지 않게 하려고. 근데 이제 와서 보니까... 개소리였네. 어차피 7일 뒤면 다 끝인데, 씨발."
 
 내 입에서 쓴웃음이 새어나온다. 그래,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난 개같은 선택을 했다. 10년이라는 시간을 동생과 함께 보낼 수 있었는데.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람.
 
 "넌 후회하는 거 없냐? 안 해본 거... 하고 싶었는데 못 해본 거."
 
-
 
 "후회요."
 
 ... 나는 잠시 고민한다.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런데 여기서 하기는 싫었다. 일종의 자존심 세우기 같은 거랄까.
 
 "가서 말해줄게요."
 
 서태주는 대답 없이 차를 돌린다. 세상이 망한다는 혼란 속에서도 핸들을 잡은 그의 손에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
 
 
 조금 뒤 차는 고급스러운 호텔에 도착한다. 이곳도 아수라장이긴 매한가지네. 체크인을 받긴 하는 거야? 나는 프론트에 가서 딱 하나 남은 스위트룸을 잡는다. 방이 꽉꽉 들어찬 걸 보니 세상이 망한다고 해도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은 많은 모양이었다. 아니, 어쩌면 세상이 망하기에 사랑을 하고 싶은 걸지도 몰랐다. 품을 뒤적거리던 나는 내 카드를 찾지 못하자 대뜸 옆에 있던 서태주의 재킷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검은 카드를 꺼낸다. 태온에서 쓰는 위장용 법인카드다.
 
 "이걸로 긁을게요. 태온 자금 쓴다면서."
 
-
 
 내 재킷 안주머니에 손을 넣는 그녀의 손길이 묘하게 신경 쓰인다. 평소라면 이런 무례한 행동을 한 부하는 가만두지 않았겠지만, 이상하게도 지금은 그녀의 당당한 태도가 나쁘지 않게 느껴진다. 어차피 7일 뒤면 모든 게 끝인데, 예의니 격식이니 그런 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래, 실컷 긁어. 어차피 며칠 뒤면 카드사도 없어질 텐데."


 로비는 혼돈 그 자체다. 세상의 종말을 맞이한 사람들이 마지막 사치를 누리겠다고 몰려든 모양이다. 비명과 울음소리, 히스테릭한 웃음소리가 뒤섞여 있다. 그 와중에 설유빈은 차분하게 체크인을 하고 있다. 그녀다운 모습이다.


 "근데... 아까 뭐라고 했지? 후회된다고? 뭐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그녀를 흘깃 쳐다본다. 평소의 나라면 부하직원의 사생활 따위 궁금해하지 않았을 텐데. 이상하게도 오늘따라 그녀의 모든 것이 궁금해진다.

-
 
 "올라가서 말해줄게요."
 
 나는 무심하게 카드키를 받아들어 앞장선다. 그의 보폭이 훨씬 커 금방 따라잡혔지만. 서태주는 은근히 내가 할 말을 기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별거 없는데. 평소였으면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마자 허리로 손을 뻗는다던가 했을 그는 이상하게 나를 두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멸망이 다가오니 사람도 변하는 건가. 조용한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방으로 올라온 우리는 침대에 걸터앉아 와인 한 병을 나눠마신다. 두 사람 다 취기는 오르지 않았지만, 빈 병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나는 이제 그에게 '그 이야기' 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입을 연다.

 "생각해보니까 제가 한때 보스를 좋아했었던 것 같아요."

-
 
 와인잔을 들어 올리던 내 손이 멈춘다. 그녀의 말이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나를... 좋아했다고? 평소의 나라면 이런 고백을 들었을 때 비웃거나, 아니면 그걸 이용해 그녀를 농락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상하게도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진다.

 "...그래서 지금은?"
 
 목소리가 예상보다 쉬어 나왔다. 와인잔을 내려놓으며 그녀를 바라본다. 붉은 와인빛이 그녀의 얼굴에 비친다. 평소에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 녹색 눈동자가 페리도트같이 참 예뻤다.

 갑자기 지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그녀가 나를 바라보던 눈빛들, 내 명령에 충실히 따르던 모습들... 그것들이 전부 '좋아했다'는 감정 때문이었을까? 이상하게도 가슴이 답답해져 나는 눈살을 찌푸린다.

 "...언제부터였는데?"
 
 묻고 싶은 말이 많아진다. 왜 말하지 않았는지, 어떤 점을 좋아했는지...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7일 뒤면 모든 게 끝날 텐데.
 
-
 
 답지않게 충격을 받은 그의 모습이 웃기다. 뭘 새삼스레. 서태주에게 좋다고 한 여자는 한둘이 아니었을텐데 말이지.

 "몰라요, 한참 몇 년 전에 그랬던 거니까."

 "지금은..."
 
 그의 얼굴을 빤히 본다. 그를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드는지 알기 위해서다. 나는 인상을 약간 찌푸린다. 충성심? 익숙함? 무슨 감정인지 잘 모르겠다. 확실한 건... 사랑은 아닌 것 같다.
 
 ...술이나 더 마실래요. 대충 주제를 돌릴 말을 뱉었지만 서태주는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내가 들고 와야 하나. 나는 그런 그를 두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
 
 그녀가 일어서는 모습을 보며 나는 와인잔을 만지작거린다. 한참 전이라... 그럼 지금은 아니라는 건가. 이상하게도 그 말이 마음에 걸린다. 평소라면 여자의 감정 따위 신경 쓰지 않았을 텐데. 멸망이 다가오니 나도 이상해지나 보다.

 "잠깐, 앉아. 술은... 내가 가져올게."

 그녀의 손목을 잡는다. 내 손아귀에 잡힌 그녀의 가는 손목이 차갑다. 평소의 나라면 이런 접촉에서 성적인 것을 떠올렸겠지만, 지금은 그저... 그녀가 멀어지는 게 싫다. 이건 후회일까, 욕망일까, 아니면 미련일까.

"왜 말 안 했어? 그때는... 세상이 끝나기 7일 전에서야 말하는 이유가 뭐야."

 묻고 나서야 깨닫는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부하 직원의 감정 따위... 알 필요도 없는데. 하지만 이제와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7일 뒤면 모든 게 끝날 텐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솔직해지고 싶다. 
 
-
 
 "세상이 끝나기까지 7일이 남았으니까요."

 어쩌면 영원히 하지 않았을 이야기. 사실 세상이 망한다고 딱히 달라질 건 없다. 그런데 나는 왜 그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까. 바라는 게 있어서? 나는 그에게 무엇을 바라지? 그에게 잡힌 손목을 내려다보다 도로 침대에 앉는다. 거리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 지금에 와서 당신은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그러니까, 세상이 망하기 전에...나를 사랑해주세요."
 
 보스가 나를 사랑하게 됐으면 좋겠어요. 그걸 원해요. 그는 후회를 물었지만 나는 소망을 답했다. 웃고 있었나,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었나. 어쩐지 입을 맞춰야 할 것 같은 말이었지만 그리 하고 싶지는 않았다. 닳아 버린 시선이 서태주를 향한다.
 
-
 
 그녀의 말이 내 귀에 맴돈다. 나를 사랑해달라고. 이상한 일이다. 수많은 여자들이 내게 사랑을 구걸했지만, 그들의 말은 전부 허영과 욕망으로 가득 찬 것이었다. 하지만 설유빈의 말에는 이상하게도 진심이 묻어있다. 마치 오래된 LP판에서 흘러나오는 재즈처럼, 쓸쓸하고도 깊이 있는.

 "사랑이라..."
 
 와인잔을 비운다. 붉은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며 쓴맛을 남긴다. 그녀를 바라본다. 평소의 나라면 이런 상황에서 그녀를 욕망의 대상으로만 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인다. 장미빛 머리카락, 녹색 눈동자, 그리고 그 안에 담긴 고독.

 "...미쳤냐?"
 
 그러나 입에서 나온 말은 생각보다 날카롭다. 하지만 그건 그녀를 향한 게 아니라, 제 안의 혼란을 향한 것이다. 와인잔을 들어 한 번에 비운다. 붉은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며 뜨거운 기운을 남긴다. 서태주는 감정 따위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그녀의 말이 가슴 한구석을 파고든다. 사랑이라... 그런 걸 할 줄 아나. 나는 그저 욕망만을 알고 살아왔는데.

 "그냥... 섹스하자고 하지 그랬어. 그게 더 쉬웠을 텐데."
 
 목소리가 평소보다도 낮고 거칠게 나온다. 와인잔을 내려놓고 그녀에게 손을 뻗는다. 솔직한 고백이 흘러나온다. 그래, 난 사랑이란 걸 모른다. 그저 여자를 가지고, 버리고, 또 다른 여자를 찾아왔을 뿐. 그녀의 뺨에 손을 대자 차가운 체온이 전해진다. 이상하게도 가슴 한구석이 아려온다. 이게 사랑일까? 아니면 그저 멸망을 앞둔 자의 허상일까?
 
-
 
 차라리 섹스를 하자고. 그다운 대답이다. 나는 서태주의 손에 뺨을 기댄다. 뜨겁다. 언제나처럼. 술을 마셔서 더 그런걸까.
 
 섹스. 할 수 있다. 나쁘지 않다. 눈을 감고 그와 보냈던 숱한 밤을 떠올린다. 나는 그의 품에서 종종 울었고, 그럴 때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할 만큼 그가 몰아붙여주기를 바라고는 했다. 밤새 엉망진창이 되어 사랑도, 원망도, 체념도 하지 못할 때까지. 그렇지만 이제는...더는 피하고 싶지 않다. 피하지 않을 것이다.

 "...싫어요."
 
 손만 잡고 잘 거예요. 서태주는 그런 내가 가소롭다는 듯 픽 웃더니 일어나 저쪽에 놓여 있던 위스키 병을 통째로 들고 온다. 저거 다 마시면 취할 텐데. 등을 지고 선 그는 지금 내가 그를 무슨 눈으로 보고 있는지를 알고 있는 걸까. 무감한 남자. 그래, 당신의 그런 면을 사랑했었다. 결국 그런 면에 지쳐 나가 떨어졌지만.
 
 그에게 '사랑해달라' 고 말한 것은 어쩌면 알량한 복수심인지도 몰랐다. 너도 한번 지독하게 매달리는 꼴을 보면 통쾌할 것 같아서. 유치해. 스스로에게 비웃음이 났다.
 
-
 
 설유빈이 내 손에 뺨을 기댄다. 차갑다. 그녀의 체온이 내 손바닥을 통해 전해진다. 섹스는 싫다고. 손만 잡고 자자고. 이상한 년이다. 평소라면 이런 말을 들었다면 비웃으며 그녀를 범했을 텐데. 하지만 지금은... 그 말이 이상하게 가슴을 파고든다.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며 그녀를 바라본다. 도리어 그녀의 눈빛이 날 비웃는 것 같아 괜히 신경이 쓰인다. 목구멍이 타들어가는 듯하다.

 "...그래. 손만 잡고 자자고? 씨발, 이게 말이 되나."
 
 웃음이 나온다. 하지만 그 웃음은 그녀를 향한 게 아니라, 이런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는 나 자신을 향한 것이다. 위스키를 한 모금 더 마신다. 뜨거운 액체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며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하지만 가슴 한구석의 묘한 통증은 사라지지 않는다. 녹색 눈동자는 여전히 나를 응시하고 있다. 그 눈동자 속에 담긴 감정이 뭔지 알 것도 같다. 복수? 증오? 아니면 진짜 사랑? 알 수 없다. 그저... 그녀의 눈동자가 예쁘다는 생각만 든다.

 "근데... 왜 하필 나야? 사랑받고 싶다면 다른 놈도 많았을 텐데."
 
 결국 옷을 벗지 않은 채로 그녀의 옆에 눕는다. 이불도 덮지 않았다. 그저 손만 맞잡은 채 천장을 바라본다. 멸망까지 7일.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과연 사랑이란 걸 할 수 있을까. 아니, 그전에... 난 과연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을까.

 "...설유빈."
 
 늘 야, 너 아니면 부실장이라고 불러서인지 입 안에 씹히는 세 글자가 어색하다. 이상한 기분이다. 마치 오래된 비밀을 푸는 것 같다. 손에 전해지는 그녀의 체온이 차갑다. 마치 얼음 같아.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차가움이 편안하다. 평생을 불태우며 살아온 나에게, 그녀의 차가움은 어쩌면 필요한 것이었는지도.
 


 
[현재 시간: 12월 25일 오전 10시 00분]
[D-6 14:00:00 until impact]
 


 몇 시간 후 아침, 나는 그보다 먼저 눈을 뜬다. 손이 한 쪽만 뜨거웠다. 크고 두꺼운 손에 거의 감싸지다시피 잡혀 있는 작은 손. 정말 손만 잡고 잤네. 이상하게 그 감각이 나쁘지 않아 나는 그대로 누운 채 멍하니 천장을 본다. 시계는 오전 10시를 가리키고 있다. 배가 조금 고팠다. 세상이 망해도 위장은 정직하구나. 이 인간 언제 일어날 셈이지. 나는 나직하게 그를 부른다.

 "보스."
 
-
 
 아침 햇살이 호텔 창문을 통해 비스듬히 들어온다. 그녀의 목소리에 나는 눈을 뜨지 않은 채 미간을 찌푸린다. 어제의 기억이 조각조각 떠오른다. 손만 잡고 잤다니. 그것도 내가 동의를 했다니. 이상한 일이다. 평소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데. 머리가 지끈거린다. 어제 위스키를 너무 많이 마신 탓이다. 손은 여전히 그녀의 것을 잡고 있다. 어젯밤 내내 놓지 않았다. 평소라면 이런 상황이 역겹고 낯설었을 텐데, 이상하게도 편안하다. 마치 오래된 습관처럼.

 "...뭐."
 
 목소리가 쉬어 나온다.대답은 퉁명스럽다. 그녀의 손을 놓지 않은 채 몸을 뒤척인다. 옆구리가 배게에 눌려 저린다. 평소와는 다른 이 상황이 낯설다. 마치 오래된 영화의 한 장면 같다. 하지만 이건 현실이다. 6일 후면 모든 게 끝날 현실.

 "배고파?"
 
 묻고 나서야 깨닫는다. 이런 다정한 말을 건넨 적이 있었나? 평소의 나라면 그저 '씨발년아 밥 먹으러 가자' 라고 했을 텐데. 이상하다. 나도 모르게 그녀를 향한 말투가 부드러워진다. 아침 햇살에 비친 그녀의 얼굴이 평소보다 더 예뻐 보인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낯설다. 어제 이상한 소리를 들어서 정신이 이상해졌나.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으며 그녀를 바라본다. 손은 여전히 맞잡은 채다. 이상하게도 놓고 싶지 않다. 마치 놓는 순간 무언가를 잃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평소의 나라면 이런 감상 따위는 갖지 않았을 텐데. 멸망이 다가오니 나도 이상해지는 모양이다.

 "룸서비스라도 시켜먹을까. ...어차피 돈 같은 건 이제 의미 없잖아."

 그녀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전화기를 든다. 이상한 기분이다. 마치 오래된 연인처럼 편안한 이 분위기가. 하지만 동시에 불안하다. 이게 사랑일까? 아니면 그저 멸망을 앞둔 자의 허상일까? 알 수 없다. 어차피 6일 후면 모든 게 끝날 텐데. 그저 변덕일 뿐이다. 다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녀와 함께 있고 싶었다.
 
-

 

 룸서비스로 아침을 해결한 우리는 잠시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는다. 자고 일어나니 이 상황이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앞으로 6일하고도 13시간 뒤에 세상은 망한다. 우리는 죽을 것이다.

 

 바깥에서 희미하게 사이렌 소리가 들리는 듯 했지만 방 안은 고요했다. 마치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출근, 할 거예요?"

 

 출근할 본부가 남아 있긴 할까. 평범한 시민들도 폭도가 되어 여기저기를 부수고 다니는 마당에, 애초에 법을 개껌으로 알던 새끼들이 더하면 더했지 덜할 리가 없다. 어쩌면 그와 내가 나타나자마자 이젠 겁낼 것도 없다며 총구를 들이밀 놈들이 이미 수두룩하게 깔려 있을 지도. 세상이 이런 엄청난 이벤트로 망하게 생겼는데 소행성도 못 보고 총알 세례에 벌집이 되어 인생을 마감하고 싶지는 않았다. 역시 출근은 안 되겠군.

 

 "전 출근 안할래요."

 

 그렇게 말하며 나는 뒤로 털썩 드러눕는다. 이 상황에서 그가 뭐라고 대답할지가 궁금했다. 그래도 10년을 이끌어 온 조직인데 마지막까지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 따위를 느끼고 있을지, 아니면 전부 허무하다고 느끼고 있을지.

-

 

 창 밖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가 귀에 거슬린다. 사이렌 소리, 비명 소리, 총성. 세상이 무너져가는 소리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소리가 멀게만 느껴진다. 마치 다른 세계의 이야기처럼.

 

 그녀의 질문에 나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출근이라... 웃기는 소리다. 아마 어제 밤부터 지금까지 강이현에게서 전화가 수십 통은 왔을 거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 새끼는 일에 충실할 놈이니까. 하지만 이제는... 그런 건 의미가 없다. 태온이고 뭐고, 이제 다 끝이다. 나는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침대에 등을 기댄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어제 마신 위스키 때문인지, 아니면 이 상황 자체가 너무 비현실적이어서인지.


 "씨발... 출근은 무슨. 그 새끼들 다 미쳐날뛰고 있을 텐데. 암살팀 새끼들은 마지막이라고 자기들끼리 서로 죽이면서 놀고 있겠지. 전략팀은 이미 다 도망갔을 거고. 아마 이현이만 일하고 있을 거다."


 창밖을 바라본다. 멀리서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하룻밤 만에 도시는 이미 아수라장이 되어가고 있다. 그동안 내가 쌓아온 모든 것들이 물거품이 되어가는 중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허탈하지가 않다. 오히려... 해방된 것 같다.


 "나도... 안 갈래. 씨발, 이제 와서 뭘 또 지키겠어. 다 끝날 건데."

 

 이번에는 그녀를 바라본다. 침대에 누워있는 그녀의 모습이 어쩐지 자꾸만 눈이 갔다. 평소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인다. 그녀의 긴 속눈썹, 살짝 올라간 입꼬리, 목선의 곡선... 내가 이런 것들을 보고 있다는 게 낯설다.


 세상도 다 끝났는데 그동안 못 해본 걸 하고 싶어졌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연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이다.

 

 "바다나 보러 갈까? 난... 한 번도 제대로 된 여행을 안 해봤거든. 늘 일 때문에 짧게 들렀다 오는 게 전부였어.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까... 그게 좀 아쉽네."

 

 그녀를 향해 돌아선다. 아침 햇살이 그녀의 장밋빛 머리카락을 비춘다. 이상하게도 가슴 한구석이 일렁이는 것 같다.

 

 씨발... 진짜 뭐가 잘못됐나.

 

 "어때? 나랑... 바다 보러 갈래?"

 

-

 

 나는 눈을 감은 채로 피식 웃는다. 그거 존나 낭만적이네요. 바다, 바다라. 희미한 어린 시절의 기억에는 늘 바다가 있었다. 이제는 떠나온 지 너무 오래되어 아득한 바다 냄새 말고는 별로 남은 것도 없지만. 지금 다시 바다를 찾으면 무언가 다른 걸 알 수 있을까. 세상이 멸망할 때까지 내가 하고 싶은 걸 찾을 수 있을까.


 "차에 기름은 있어요? 여기서 바다 먼데."
 

 몸을 일으켜 스트레칭을 한다. 그래, 세상이 망하기 전에 바다 한 번쯤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신발에 모래가 가득 찰 때까지 해변가를 거닐고, 어디서 썩은 나뭇가지를 주워와 모래사장에 글씨도 쓰고, 그러다 배고프면 근처 식당에서 바가지도 써 보고... 제법 괜찮을 것 같다.

 

-

 

 그녀의 목소리에 묘한 즐거움이 묻어있다. 이상하게도 그 톤이 마음에 든다. 평소의 설유빈이라면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을 텐데. 어쩌면 우리 모두 죽음 앞에서는 조금 달라지는 걸까. 나는 주머니에서 차키를 꺼내 손가락으로 돌린다. 새까만 제네시스. 어제 호텔에 올 때 타고 온 차다.


 "기름? 씨발... 걱정도 팔자네. 없으면 훔치면 되지. 이제 와서 뭘 또 정상적으로 하겠어."

 

 창밖을 본다. 도시는 이미 아수라장이 되어가고 있다. 멀리서 총성이 들린다. 아마 강도들이 은행을 털고 있겠지. 이런 상황에서 주유소 하나 털어먹는 건 아무것도 아니다. 도로 위에는 이미 약탈자들이 설치고 다니는 게 보인다. 차를 몰고 가다가 그런 새끼들을 만나면... 아, 재미있겠군. 이런 상황에서 바다로 간다는 게 무모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서 더 가고 싶어진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이 순간, 그녀와 함께. 나는 설유빈을 향해 돌아선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아침 햇살에 반짝인다. 스트레칭하는 모습이 꼭 고양이 같아 보인다.


 "근데... 진짜 갈 거야? 나랑? 둘이서?"

 

 목소리가 의도치 않게 조심스러워진다. 마치 거절당할까 두려워하는 것처럼. 이런 내가 낯설다. 서태주가 언제부터 이렇게 남의 대답이 두려웠던가. 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대답이 중요하게 느껴진다. 이 대답이 앞으로의 6일을 결정할 것이란 확신이 든다.


 "동해안으로 갈까? 강릉이나... 아니면 속초? 이 시간에 출발하면 저녁 즈음에는 도착할 수 있을 거야."

 

-

 

 "...포항으로 가요."

 

 특별히 그쪽 바다가 예쁜 건 아니었다. 그냥 내가 포항에서 태어났으니까. 왠지 그쪽으로 가고 싶었다. 보스에게 굳이 이 얘기까지 하지는 않았다. 지금의 그라면 이유를 덧붙이지 않아도 들어 줄 것 같아서.

 

 ...그는 나를 사랑해 보기로 마음 먹은 걸까? 카운트다운이 돌아가기 시작한 뒤로 서태주는 평소보다 태도가 누그러져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멸망 앞에서의 체념인지, 뒤늦은 관심 표시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는 별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조금 기뻐 보였다. 보스가 바다를 좋아했던가. 함께 바다를 갈 일이 없었던 터라 잘 모르겠다. 우리는 먹을 것을 좀 넉넉히 챙겨 지하주차장으로 향한다. 다행히 차를 도둑맞았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용케 안 털어가고 잘 남아 있네.


 가는 길이 무료해 라디오를 틀어 보려 했지만 아무리 채널을 돌려도 지직거리는 소음밖에 나질 않았다. 서태주는 짧게 말한다. 걔네라고 안 튀었겠냐. 그러네요. 우리도 도망가는 중인데.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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