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ction/Tale

호기심 많은 비서는 오래 살아남지 못한다

설유빈 2025. 1. 22. 18:23

* 원래 망상썰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길어져서 따로 분리했습니다. 
* 드림요소(작품의 캐릭터와 나의 캐릭터가 어떤 관계로 엮이는 것) 주의! 여기는 장르 특성상 드림이 기본이기는 하지만... 저는 작품 속 캐릭터들끼리 노는 게 익숙한 사람이라서 드림주의를 붙입니다
 
하설영 실장님의 신입비서로 들어가서 그와 진득하게 엮이고 싶다... 외관이 너무나도 나긋다정온미남인데 말투도 나긋하고 발걸음도 우아하다면서 정작 대화해보면 눈빛은 차가운데다 모든 걸 놓치지 않고 세심히(어쩌면 집요하게) 관찰하고 있다는 점이 좋음. 외모와 차분한 태도에 홀려 이 사람은 정상인일거야 내 말을 잘 들어줄거야... 라고 멋대로 오해했다가 정신차려보면 그에게 영혼까지 다 털리고 처분만을 기다려야 하는 신세가 되어 있었을 사람들이 꽤 많지 않았을까(차도살인의 달인이실 것 같은 느낌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중)
 
아무튼 그래서: 전략팀에서 허구한 날 싸이코패스 팀장에게 치이고 사느라 그를 향해 이를 바득바득 갈던 유빈이. 어느날 실장님의 비서 자리가 갑자기 비어 임시 비서를 모집한다는 말을 듣고 곧장 달려가 저요저요 제발저요 제가아니면안돼요 를 외치는데...
 
+. 글 쓰는 중에 옆동네 남유진 실장님 비서 버전이 올라왔네요,,? 사실 쓰다말고 그거 하다가 더 늦었습니다. 역시 실장님들의 비서 자리는 꽤나 매력적이고 재미있는 곳인 것 같네요(๑•ᴗ•๑)



 '정말로... 전략팀 탈출이라고?'
 
 퇴근길에 합격 문자를 받자마자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더 이상 매일 아침 강욱의 얼굴을 볼 필요가 없겠다는 것이었다. 내일부터 전략팀 사무실 대신 실장실로 출근하라는, 비서실로부터 온 그 문자의 한 글자 한 글자가 어찌나 아름답게 보이던지!
 거지같은 전략팀에서 뛰쳐나갈 수 있다는 희망에만 빠져 앞뒤 안 재고 달려들었던 것이기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었는데, 나는 생각보다도 높은 경쟁률을 뚫고 하설영의 비서가 되는 데 성공했다.
 사람들은 종종 아무 말 없이 자신을 쳐다보는 하설영의 차가운 눈빛이 태온에서 가장 무섭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아무렴 대놓고 먹잇감 갖고 노는 고양이마냥 사람 괴롭히는 그 싸이코패스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드디어 새로운 사무실로 출근하는 첫날. 지시받은 시간보다 30분 이르게 나온 나는 아직 인적이 드문 본부 로비를 가로질러 실장실로 향한다. 조용한 로비에 또각이는 내 발걸음 소리만 들리자 어쩐지 더 긴장되는 기분이었다.
 다혈질에 인성 파탄자들이 가득한 이 태온에서 언제나 차분하고 과묵한 태도를 유지하기로 유명한 인물, 어떤 상황에서도 해결책을 내어 놓는 뛰어난 전략가. 모두 사람들이 하설영 실장을 두고 하는 말이다. 내가 그런 완벽한 인물의 마음에 들 수 있을까...


 그런 걱정을 하다 어느새 실장실 문 앞에 도착한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실장실 문을 똑똑 두드린다. 그러나 소리나게 문을 두드렸음에도 안에서는 들어오라던가, 기다리라던가 하는 소리가 들려오기는커녕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분명 계실 테니 인사드리고 오라고 연락받았는데. 설마... 첫날부터 문전박대?

 불안에 사로잡혀 문을 한 번 더 두드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갑자기 실장실 문이 달칵 열린다. 움찔 놀라 천천히 고개를 들어 시선을 올리자 보이는 것은, 고요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하설영의 얼굴. 

 
 하설영은 나보다 거의 머리 하나만큼 더 컸기 때문에 나는 그의 모습을 제대로 보기 위해 고개를 살짝 들어야 했다. 연한 갈색 머리카락은 빛을 받을 때마다 밀크 초콜릿처럼 부드러운 색감을 띠었고, 그 아래에 자리한 눈동자는 색이 옅었음에도 고요히 가라앉아 있어 깊이를 알 수 없는 묘한 느낌을 풍겼다. 또한 그의 깔끔하고 정연한 성격을 드러내듯, 젤을 발라 깔끔하게 정리한 머리스타일과 잘 다려진 베이지색 정장은 자연스러운 흐름을 보이면서도 무엇 하나 삐져나온 부분이 없었다. 일견 싸늘하게까지도 느껴지는 무표정은 전체적으로 매끄럽고 예쁜 곡선의 온화한 이목구비와 약간 이질적으로 보일 법도 했지만... 왼쪽 눈 아래의 작은 미인점이 둘을 조화롭게 섞어 주고 있어 그에게선 강제하지 않아도 스스로 고개를 숙여야 할 것 같은 은근한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하설영은 탐색하는 듯한 시선으로 눈길만 내려 나를 머리에서 발끝까지 관찰하듯 훑어보더니, 이내 문고리를 잡지 않은 손으로 넥타이를 살짝 고쳐 매며 입을 열었다.


 "설유빈 씨. 맞습니까?"

 "...아, 네...! 오늘부터,"

 "자기 소개는 들어와서 하도록 하죠."

 하설영은 자기 소개를 하려던 내 말을 끊고 반쯤 열려 있던 문을 조금 더 열어 나를 실장실 안으로 안내했다. 나는 너무 성급했다는 생각에 얼굴을 살짝 붉히고 허둥지둥 그를 따라갔다. 앞서 가는 하설영의 걸음걸이에서는 신기하게도 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다. 어쩐지 아까 아무 소리도 안 들렸던 이유가 있었구나...
 우드톤의 바닥과 벽면, 한쪽 통창으로 길게 들어오는 아침 햇살과 그 햇살에 연두빛으로 반짝이는 관상용 나무 몇 그루. 그러나 실장실을 채운 가구와 집기들은 하나같이 흑백의 직선적이고 차가운 디자인이다. 나긋하게 보이면서도 실상 속은 자로 잰 듯 단호하게 떨어지는 이 공간은 어쩐지 하설영이라는 사람과 아주 닮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천천히 실장실 안쪽으로 걸음을 옮겨 책상 위에 놓아두었던 나의 이력서를 집어든 하설영은 내게 아까 하지 못한 자기소개를 할 것을 요청했다. 이미 거기에 다 써 있을 텐데... 굳이 다시 시키는 이유가 뭐지? 의아해 하면서도 나는 그의 지시대로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간략하게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책상에 기대앉아 내 소개를 조용히 듣던 하설영은 이따금 고개를 끄덕이거나 하며 몇 가지 질문을 덧붙였다. 질문이 그다지 많지는 않았지만, 하나하나가 면접 때 받았던 질문보다도 날카로웠기에 나는 그의 앞에서 말실수를 하지 않으려 온 정신을 집중해야 했다.
 
 "전략팀에서 나온 이유가... 적성에 맞지 않아서. 라고 썼던데, 맞습니까? 전략팀에서 설유빈 씨의 실적은 제법 좋았다고 알고 있는데요."
 
 "그건..."
 
 솔직히 말하자면 적성 이야기는 핑계였고, 그냥 강욱이랑 일하는 게 좆같아서 튀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저는 상사에게 괴롭힘 당하는 것을 즐기는 마조히스트가 아니라서 뛰쳐나왔습니다.' 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즉석에서 하설영이 납득할 만한 대답이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했다.
 
 "...오, 래전부터 실장님을 존경해 왔습니다. 실장님과 함께 일하는 것이 태온 들어올 때부터 제 꿈이라..."
 
 "그렇습니까? 일단은... 알겠습니다." 
 
 침묵이 더 길어지면 의심할까 싶어 되는 대로 내뱉었더니 무슨 웃기지도 않는 아부성 멘트가 나와 버렸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는 발언에 그의 시선을 피하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지만 그는 묘한 시선으로 나를 잠시간 응시할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실수했다고 생각한 건데... 괜찮은 건가? 고개를 살짝 들어 그의 눈치를 보자 그는 별 말 없이 책상 한켠에 정리되어 있던 서류철 중 하나를 꺼내 나에게 건넸다.
 서류철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업무 관련 문서들과 당분간의 주요 일정이 담긴 캘린더 하나. 분명 이만한 조직의 실장이 하는 일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는 예상했지만, 상상 이상으로 일정이 빼곡한 캘린더를 마주하자 벌써부터 질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만 숙지하면 따로 비서팀에서 교육받을 필요는 없을 겁니다."
 
 하설영은 별 감정이 담기지 않은 사무적인 태도로 말하고는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들을 꺼내와 바로 일을 시작했다. 나는 눈치를 보다 그가 나를 완전히 신경쓰는 것 같지 않자 소파에 앉아 받은 자료를 넘겨 본다. 양이 꽤 되었지만 그래도 사흘 정도면 다 외울 수...
 
 "아. 업무는 내일부터 시작이니 자료는 오늘 다 숙지하시기 바랍니다."
 
 ...나, 잘 도망쳐 온 것 맞겠지...?


***


 어느덧 그의 비서로 일한 지도 한 달째. 하설영은 비서를 고생시키지 않는 좋은 상사였다. 늘 정해진 스케줄대로만 움직여 급하게 무언가를 준비해야 할 일이 거의 없었고, 불필요한 일로 화를 내거나 책을 잡지도 않았다. 오히려 호되게 질책당해도 할 말이 없다 생각했던 일에도 크게 화를 내지 않아 오히려 잘못한 사람이 더욱 조심하게 되곤 하니 그가 얼마나 인격적인 상사인지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나 또한 의외로 비서 일이 적성에 맞아 비서팀에서도 아예 임시 말고 정식으로 일할 생각이 없냐는 제의를 받게 되었기에... 요즘처럼 태온에서의 삶이 평안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나날이다.

 
 아침에 출근하면 나는 하설영에게 오늘 일정을 간단하게 보고하고, 새로 온 이메일이 있는지 확인한다. 그리고 나서 전날 만들어 둔 자료를 일정 순서대로 정리하면 아침 루틴 끝.
 태온의 실장인 그는 하루에도 여러 개의 회의에 참석해야 했다. 그때마다 나 또한 비서로서 하설영을 따라다니며 바쁘게 움직여야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는 시간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회의 외에도 종종 누군가를 독대하러 가곤 했는데(상대는 대개 성윤조였다), 그럴 때면 나는 혼자 실장실에 남아 다른 업무를 보거나 실장실을 정리하곤 한다. 그리고 나서도 할 일이 없으면 적당히 개인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내가 실장실을 정리하는 것에 거의 간섭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이 손을 대지 않아도 실장실이 깔끔하게 유지되는 것에 만족하는 듯했다. 다만 그가 딱 한 가지 나에게 주의를 준 게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책상에 손을 대지 말라'는 것. 어차피 내가 손대지 않아도 늘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그 공간을 구태여 따로 정리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무릇 사람이라면 하지 말라고 했을 때 괜한 호기심이 피어오르는 법. 자꾸만 책상에 시선이 가던 나는 딱 한 번 용기를 내어 그 이유를 하설영에게 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 그는 불필요한 궁금증을 갖지 말라는 단호한 대답으로 내 호기심을 잘라냈고, 그 뒤로 나는 책상 쪽은 쳐다보지도 않게 되었다. 단지 하설영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을 뿐 정말로 마음 속까지 관심을 끊은 건 아니었지만.

 
 사실 책상을 제외하고서도 하설영 실장은 그 자체로 다소 많은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이었다. 지난 한 달간 곁에서 지켜본 그는 실장으로서의 업무적 자질은 차고 넘쳤지만, 딱히 모두를 밟고 올라섰을 법한 인물로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다소 냉정하고 칼 같은 면이 있긴 했으나 그는 언제나 우아했을 뿐 물불 안가리는 모습은 딱히 찾기 힘들었고, 그래서인지 조직 내에 적이 많아 보이지도 않았다.
 물론 실장으로서 적이 없다는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힘의 논리가 강력하게 작용하는 이곳에서, 늘 나긋한 태도를 보이는 하설영을 지켜보다 보면 (나 같은)말단도 아닌 간부들이 정말로 '하설영'이라는 사람에게 마음 깊이 복종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되는 것이다. 단지 그들이 실장이라는 직함 앞에 조아린 것은 아닐까 하는.

 당장 강욱만 봐도 그렇다. 그는 팀장의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하설영에게 건방지기 그지없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강욱이 매일같이 도발해도 하설영은 언제나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며 사무적인 태도로만 그를 응대했다. 대놓고 싸움을 걸어 오는데도 딱히 밟아 놓을 생각이 없어 보이는, 안이하다면 안이한 태도. 그렇기에 나는 그가 이 태온에서 살아남는 것으로도 모자라 도대체 어떻게 그 많은 경쟁자들을 누르고 실장이라는 높은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는지를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하설영이 잠시 보스와 할 이야기가 있다며 자리를 비우고 시간이 조금 지났을 무렵. 방 안에서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평소처럼 실장실 한켠에 마련된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오늘 남은 일정을 찬찬히 넘겨보던 중이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신경 쓰이는 소리의 근원지를 찾는다.
 귀를 기울여 보니 그리 크지 않은 진동은 아무래도 책상 서랍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책상을 건드리지 말라는 하설영의 지시가 있었기에 나는 그 소리를 애써 무시하려고 했지만... 진동은 끊이지 않고 계속 울렸다.

 
 치열한 고민 끝에 결국 나는 책상 앞에 섰다. 정확히 말하자면... 참으려고 노력했지만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책상 앞에 서 있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불안한 마음에 문가를 힐끔거리다 조심스럽게 서랍 가장 위 칸을 열자, 그 안에는 전화기 한 대가 빛을 내며 울리고 있었다.

 이건 분명 하설영의 비밀 중 하나일 것이라는 직감이 뇌리를 관통한다. 나는 흥분과 긴장으로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푸른 화면에 시선을 집중한다.

 도대체 뭐라고 써 있는 거지?

 손가락 두 마디 만한 작은 화면이라 잘 읽히지 않았다. 그러나 전화기의 위치가 달라지면 들통날 위험이 있었기에, 나는 화면에 뜬 숫자를 읽기 위해 서랍 쪽으로 좀 더 몸을 기울인다.

 누군가의 연락처인 것 같기도, 혹은 어떤 암호인 것 같기도 한 작은 숫자들. 

 그는 왜 이것을 나에게 숨기려 들었을까. 이 숫자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거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그때, 등 뒤에서 들리는 차분한 목소리에 순간 움찔한 나는 숨 쉬는 법도 잊어버린 채 삐걱이며 고개를 돌린다. 발걸음 소리도 내지 않고 어느새 내 바로 뒤까지 다가온 하설영이 뒷짐을 진 채 언제나처럼 고요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러나 나를 내려다보는 옅은 갈색의 눈동자는 여태 본 적 없는 온도로 싸늘하게 얼어붙어 있다.
 
 그리고 마치 폭풍의 눈 한 가운데에 서 있는 듯한 정적 속에서, 나는 비로소 내가 하설영에 대해 아는 것이 조금도 없었음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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