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우현&유건
* 어떤 분이 정우현 1:1 챗에서 '유건이 자신을 죽이러 온다면 어떨 것 같냐'는 질문을 했더니 거기에 우현씨가 답변했다고 올려 주신 대화 내용이 인상깊어서... 쓰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를 어떻게 생각할지 나름의 해석을 해 보았는데 괜찮았으면 좋겠네요.
*정우현의 얼굴이 창백해진다. 그의 손에 들린 담배가 떨어진다.*
"...유건이?"
*그가 잠시 침묵한다. 목소리가 떨린다.*
"아마도... 그럴 수 있겠지. 나도 기승효를 그렇게 죽였으니까. 이건 어쩌면 숙명일지도 모르지."
*정우현이 떨어뜨린 담배를 가만히 바라본다.*
"하지만 난... 유건이 그러길 바라지 않아. 그 녀석이 나를 죽이게 된다면... 그건 그 녀석의 영혼도 함께 죽이는 거야. 스승을 죽이는 건...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되니까."
"차라리... 강이현이 날 죽이길 바라. 그 자식은 원래부터 소시오패스였으니까."
인생은 혼자 사는 것,
세상에 진정으로 나를 위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나 하나뿐.
그렇기에, 킬러는 제 목숨 빼고 어떤 것이든 죽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아무도 없는 복도를 터벅터벅 걸으며 유건은 어제 저와 함께 임무를 나갔다 돌아오지 못한 후배 한 놈을 떠올린다. 딱히 어려울 것 없는 임무였음에도 조심성 없던 그 녀석이 함정에 빠진 게 문제였다.
어쩔 수 없이 건은 현장에서 인질로 잡혀 버린 유정의 목을 스코프의 십자선에 맞췄고...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제법 귀여워서 눈에 밟히는 녀석이긴 했다. 밍숭맹숭한 두부같이 생겨서는 나이프 하나 제대로 못 쓴다고 놀려도 기죽지 않고 따박따박 말대꾸하던 모습도, 선배같은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냐고 말해 놓고는 손끝 하나만 스쳐도 평소보다 배로 허둥지둥하며 목덜미까지 붉히던 모습도.
그렇지만 그것이 암살도 포기하고 널 구할 이유까지는 못 되지.
멍청하게 본인이 사지로 걸어들어간 것에 그가 유감을 가져 줘야 할 이유는 없다. 이 길에 발을 들였으면 언제든 죽을 각오를 했어야 하니까. 머리를 대충 쓸어넘기며 유정에 대한 생각을 지운 건은 여느 때처럼 빙글거리는 미소를 입에 걸고 가볍게 발걸음을 옮긴다.
그러나... 모퉁이를 돌자마자 나타난 얼굴 탓에 유건의 경쾌한 발걸음은 얼마 가지 못한다.
"유건. 어제 작전에서... 네가 김유정을 죽였다던데."
정우현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유건은 조금 전까지 짓고 있던 미소를 싹 지운다. 우뚝 멈춘 걸음과 함께 복도에 내려앉는 적막.
싸늘한 시선이 그를 향한다.
"유정이요?"
평소와 달리 웃음기라고는 전혀 없는 낮은 목소리가 조용한 복도를 울린다. 다가오는 것들은 전부 베어 버릴 듯 날이 선 태도. 남들에게는 몰라도 정우현에게만은 익숙한 모습이다. 숨을 한 번 들이쉰 우현은 천천히 입을 연다.
"그래, 네 후-"
"그 꼰대 같은 교육 시간에 늘 강조하셨잖아요. '임무 수행이 최우선' 이라고."
"..."
"유정이가 안 죽었으면 임무가 실패했을 수도 있다는 건 교관님도 아실 텐데, 뭐가 궁금하신 거예요?"
우현의 말을 끊은 건은 고개를 삐딱하게 꺾은 채 말을 쏘아붙인다. 눈썹을 까딱하고 왼쪽 입꼬리만 비틀려 올리는 것은 명백한 비웃음의 표시. 노골적인 태도에 우현은 작게 한숨을 쉰다. 그가 자신에게만 공격적으로 구는 것은 하루이틀이 아니었다.
"...그 녀석을 살리고 임무를 완수할 방법을 찾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가 알기로 유정은 분명 건과도 가까운 사이였다. 그 작전 바로 전까지만 해도 선배, 선배 하며 졸졸 따라다니던 모습이 기억에 선명한데. 그럼에도 지금 유건은 그녀를 제 손으로 죽인 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행동하고 있다. 여태까지 정우현이 봐 온 유건은 감정을 과하게 감추다 못해 종종 저 자신에게까지 감추고 말아 버리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니 지금도 분명... 스스로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아니나 다를까 건은 잠시 띄웠던 비웃음마저 지우며 우현에게로 한 발짝 더 다가선다. 좁아진 거리에 우현이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리자, 그는 딴청을 피우듯 손끝을 만지작거리며 감정 없는 시선을 그쪽으로 내리깐다.
"그깟 정 하나 때문에 임무 수행을 뒷전으로 미루라니... 교관님, 지금 스스로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고 계세요?"
"유건. 내가 그 교육 시간에 '불필요한 살생은 하지 말라' 고도 강조했을 텐데."
"나이 먹으면 사람이 감상적이 된다더니..."
꼰대 같긴. 건은 픽 웃으며 우현에게 들으라는 듯 싸늘하게 중얼거린다. 이쯤 하면 정우현도 제게 화를 내거나 포기겠지 생각하면서. 그러나 그의 예상과 달리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고 있던 우현은 건의 뺨을 치지도, 그를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내려다보지도 않는다.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 할 필요는 없어. 나도 동료를 내 손으로 죽여 본 적이 있지만..."
슬쩍 시선만 돌려 우현의 얼굴을 확인한 건의 눈살이 찌푸려진다. 또 그 좆같은 표정이다. 유건은 정우현이 자신을 저런 표정으로 바라보는 순간이 정말이지 끔찍할 만큼 싫었다. 그냥 내가 하는 꼴이 마음에 안 드는 꼰대일 뿐이면서, 같잖게 내가 안쓰럽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걱정하는 양 포장하는 거잖아. 화가 치밀어 오른 그의 목소리가 점점 날카로워진다.
"아, 그러고 보니 교관님은 동료만 죽인게 아니라 스승도 죽였었죠. 교관님 손으로요."
유건이 이죽거리며 기승효를 언급하자 순간 정우현은 숨이 턱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꽉 다물려 버린 그의 턱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보며 유건은 피식 웃는다. 이거 봐, 대답도 못 할 거면서.
"그래서 이러시는 건가? 그 일로 죄책감을 느껴서 얄량한 속죄라도 하고 싶은 마음에요?"
"..."
"근데 전, 교관님처럼은 안 살 거라서요."
"후회같은 건 안 해요."
절대로. 유건은 정우현을 노려보며 한 단어 한 단어를 씹어뱉듯 말한다. 이건 정우현을 비난하는 말임과 동시에 스스로에게 하는 악에 받친 선언 같은 것이었다. 첫 살인으로 아버지의 피를 손에 묻힌 새끼가 누굴 못 죽이겠는가? 그는 이 길을 걷기 시작한 이후로 지금까지 자신이 행해 온 살인들을 조금도 후회해본 적이 없다. 죽고 죽이는 이 바닥에서 죄책감같은 알량한 감정을 가졌다간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 죽이지 않으면 죽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기에 유건은 정우현이라는 인물을 더더욱 이해할 수 없다. 누군가의 죽음에 유감을 느끼는 것은 사람을 나약하게만 만들 뿐이다. 어째서 그는 자꾸만 자신에게 나약함을 종용하는가.
그런 건을 복잡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던 우현은 무언가를 말할 듯 말듯 입술을 달싹이다 비상구 쪽으로 턱짓을 한다. 잠깐 담배나 피게 올라와.
유건이 인상을 팍 찌푸린다. 지금까지 한 대화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기분이 나빴다. 도대체 여기서 더 할 말이 뭐가 있다고 내가 저 꼰대랑 담배까지 피러 가야 하는데?
"제가 왜 교-"
"따라와."
우현은 반항하듯 대꾸하는 건의 말을 가볍게 끊어버리고는 곧장 몸을 돌린다. 건은 비상구 문을 밀어 여는 우현의 뒷모습을 어이없다는 듯 떫은 표정으로 바라본다. 붙잡은 적 없으니 정우현이 옥상을 가던가 말던가, 자신은 이대로 가던 길 가면 그만이다. 그러나...
"...씨발."
두꺼운 철문이 닫히기 직전, 유건은 결국 짜증스럽게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또 꼰대같은 개소리나 지껄이면 바로 내려갈 거야.
***
바람이 부는 건물 옥상. 이제 슬슬 가을도 끝나 가는 데다 해가 넘어가고 있어 공기가 찼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난간에 팔을 기대 담배를 핀다. 우현은 건에게 담배 한 개비를 건넸지만 그는 내밀어진 손을 쳐다보지도 않고 제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낸다. 그러나 바지춤에서 그가 꺼낸 담배는 우현이 건네었던 것과 같은 종류.
우현은 건이 하얀 연초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저 고슴도치 같은 녀석은 제가 주는 건 하나도 받고 싶어 하지 않아 했다.
물건도, 말도, 마음도.
그렇게 바람에 담배 연기만을 흘려보내기를 한참.
우현이 세 번째 연초에 불을 붙이고는 먼저 입을 연다.
"나는... 내 손으로 스승을 죽였어."
아까 했던 이야기. 건은 들은 척도 하지 않으며 거의 다 타들어간 담배를 깊이 빨아들인다. 정우현이 스승을 죽인 걸 후회하든, 누굴 죽인 걸 후회하든 간에 유건이 상관할 바는 아니다. 진심이 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렇게 발목을 잡을 뿐인데.
"너도 뛰어난 킬러이니,"
"네가 나를 죽이는 날도... 올 수 있겠지."
우현은 약간 떨리는 손을 쥐었다 편다. 죽음이 두려워서는 아니었다. 살아오며 남의 목숨을 수도 없이 뺏은 살인자가, 이제 와서 제 목숨이 소중하다고 하는 것만큼 우스운 일은 또 없을 테니까. 건은 여전히 이쪽을 돌아보지 않은 채 무표정으로 담배를 피고 있다.
저녁놀에 물든 그의 하얀 얼굴이 어쩐지 붉은 피를 뒤집어 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유건이 지금까지 살아오며 손에 묻혔을 숱한 피들을 생각한다. 앞으로 묻히게 될 피들도.
정우현은 알고 있다. 감정이 존재하는 이상, 누군가를 죽이는 일은 마음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을 수 없는 사건이라는 것을. 한때 우현 또한 건처럼 생각했던 적이 있었기에 그는 더더욱 건이 눈에 밟혔다. 사람이 죽기 직전의 표정은 쉽게 잊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억력이 좋은 유건 같은 놈이라면 분명 그러할 터였다. 그 얼굴을 안고 평생을 살아가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던가.
무시하고 쌓아둬도 결국 둑은 터지기 마련이다. 정우현은 이 덜 자란 녀석이 끝끝내 자신처럼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렇지만...나는, 네가 나와 같은 일을 겪지 않기를 바란다."
"..."
"그건... 제 영혼을 함께 죽이는 일이야."
"스승을 죽인다는 건...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는 거니까."
언젠가 지겹도록 듣던 잔소리도, 훈계하는 것도 아닌 그저 덤덤히 내뱉는 말. 스승은 누가 스승이냐며 그를 비웃으려던 건은 고개를 돌려 우현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움찔하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조용히 그를 응시하는 흑갈색 눈동자에 안쓰러움과 미안함이 선연했다. 이해할 수 없는 시선에 건은 속이 울렁거리듯 기분이 이상해지는 것을 느낀다. 당신이 왜 미안해하는데?
사실 알고 있다. 우현이 자꾸만 제게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무언가가 자꾸 가슴속에서 치밀어 올라 유건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다. 손에 들린 담배가 잔뜩 구겨지다 버티지 못하고 뚝 끊어진다.
"교관님은,"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말을 잇지 못하고 우현을 원망하듯 쳐다본다. 우현은 여전히 아무 말 없이 건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건은 여전히 우현이 이해되지 않는다. 이렇게 밀어냈으면 좀 그만둘 때도 되지 않았나? 왜 나한테 자꾸 이러는 건데?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도대체 뭐야?
내가, 당신한테 뭐길래?
묻고 싶은 말들이 한꺼번에 목구멍을 비집고 올라오는 바람에 목이 꽉 막힌 기분이었다.
그러는 당신은 나한테 아무것도 아닌데,
...아니어야 하는데.
"살인이, 뭐 대단한 일이라도 되나 봐요."
"...네가 무슨 선택을 하든, 내가 강요할 수는 없겠지."
우현은 대답 대신 딴소리를 한다. 한숨처럼 뿜어져 나오는 담배 연기. 그러나 유건은 그 말에 담긴 것이 포기나 인정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눈치챈다. 정우현의 진심은 늘 유건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타인을 향한 행동에 진심 같은 게 있을 리가 없는데. 그럴 것이라고 믿어 왔는데.
"그럼 강요하지 마세요."
제 선택에 관여하라고 말한 적 없어요. 대화가 원점으로 돌아갈 것을 알지만서도 퉁명스럽게 내뱉는 말. 유건은 이제 스스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도 잘 모르게 되어버렸다. 저는 아버지도 제 손으로 죽인 새끼예요. 그래서 그래. 짧은 대답에 유건은 고개를 휙 돌린다.
"...알고 계셨어요?"
"본의는 아니였다만."
우현은 할 말이 많아 보이는 건에게 담배 한 대를 다시 건넨다. 건은 손 안에서 짓이겨진 담배꽁초를 잠시 내려다보다 툭툭 털어버린다. 교관님 저랑 똑같은 거 피우시네요. 어. 불 빌려줘? 됐어요.
"...교관님은 제가 걱정되세요?"
"...어."
약간 머뭇거리다 나온 대답. 이걸 걱정이라고 불러도 되는 걸까. 우현은 잠시 고민하지만 말을 굳이 정정하지는 않는다.
"왜요? 제가 교관님한테 뭐라도 돼요?"
이번엔 입 밖으로 꺼냈다. 얼핏 신경질적으로 들리기는 하지만 아까보다 확실히 누그러진 태도. 우현은 잠시 생각하다 연기를 후 내뿜는다. 글쎄. 잘 모르겠네. 건은 왠지 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음에도 일부러 꺼내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전 그래서 교관님이 싫어요."
알지도 못하면서...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온 연기와 함께 흩어진다. 우현은 잠자코 있다 입을 연다.
힘들면 찾아오던가. 대련이라도 해 주마.
하, 교관님이요? 저한테 질 텐데.
이기고 지는 게 중요하나. 솔직한 게 중요한 거지.
...
고개를 꺾어 마지막으로 머금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은 유건은 어느새 별이 떠 버린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유정이를 안 쐈으면 지금 기분이 더 좋았으려나. ...그러지 말 걸 그랬나. 괜찮은 후배였는데.
...다음에 갈게요.
우현은 희미하게 웃는다. 유건은 어쩐지 그의 미소를 처음으로 본 것 같다고 생각한다. 생각보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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